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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산 김일훈 25] 동무들 백골 뒹구는 만주 독립운동 터전에서

작성자
인산한의원
작성일
2023-11-06 16:53
조회
491
만주 어느 고을에 덩치 좋고 힘이 장사인 소문난 못된 깡패가 있었다. 항시 길목 어귀에 자리잡고 서서 지나가는 행인에게 새끼손가락을 걸게 한 다음 지면 통행세로 물건이나 돈을 빼앗고 이기면 그 길을 그냥 지나가게 해 주겠다고 하면서 행패를 부렸다. 이런 식으로 인근에 악당으로 악명을 날리고 있었는데 어느날 이 깡패에 시달리다 못한 사람이 날쌔고 용맹한 이로 인근에 소문이 자자한 지을룡(운룡)에게 그 깡패를 혼내줄 것을 부탁해 왔다.

운룡이 혼 내주려고 그 깡패가 지키는 길을 지나가니 아니나 다를까 또 손가락 걸기를 수작 부려 왔다. 운룡은 흔쾌히 응하며 손가락을 거는 동시에 손가락에 기를 넣어 번개같이 힘을 쓰며 낚아채니 그 깡패의 손가락이 쑥 빠져 버렸다. 혼이 나간 깡패가 무릎을 꿇고 운룡에게 형님으로 모시겠다며 다시는 길가는 행인을 괴롭히지 않겠다고 맹세하였다.

참을 수 없는 한심한 인간 작태는 예나 지금이나 어디고 있게 마련이다. 한일병탄 이전에는 고을에서 양반으로 호의호식하던 이들 중에서도 빼앗긴 나라를 되찾고자 낯 설고 물 선 이국 땅 만주로 모여든 이들이 많았다. 게 중에는 상놈도 있었고 천민도 있었고 점잖은 이도 있었고 어리석은 이도 있었다. 그들은 모두 같은 처지로 보금자리 하나 없이 들개마냥 외로운 산과 들을 굶주리고 추위에 떨면서 일본군대에 쫓기고 중국 산적떼 마적에게 쫓기면서 이 산 저 산 떠돌고 있었다.

그 처량한 와중에도 누가 위고 아래고 서열을 따지고 내가 양반이니 지위가 높아야 하네 누가 상놈이네 하고 회의라도 할라치면 어리석은 이들일수록 말이 많아지고 와글와글 다투니 목불인견이었다. 운룡은 더러운 꼴은 참지 못하는 성격이었다. 나이 꽤나 먹은 선배들이 왈가왈부하면 가장 나이 어린 운룡이 바로 “개새끼들! 다 죽여버린다!” 벽력같이 호통치며 칼을 빼서 좌중 앞에 꽂아버리니 모두들 기가 막혀 일순 잠잠해지면서 상종 못할 막되먹은 놈이라고 슬슬 피해 흩어졌다.

명색이 독립군이라고 군대를 이루며 군량을 공급받는 단체가 아니었다. 때때로 흩어져 한 명 혹은 둘씩 각자 알아서 끼니를 이어가며 여기저기서 닥치는 대로 일본군인을 쳐죽이는 것이 독립군이었다. 군대가 지나간다는 정보를 입수하고 풀숲에 숨어 있다가 지나가는 일본군 발등을 몽둥이로 냅다 내리쳐서 번개같이 여러 명을 고꾸라뜨리기도 하였다. 때론 죽창으로 찍어 죽이곤 했다. 기회 닿는대로 닥치는대로 손에 잡힌 무기가 무엇이든 간에 원수 일본군을 쳐죽이고 중국 도적떼로부터 목숨을 지키며 조국 광복을 꿈꾸는 투쟁의 하루하루였다.

얼마나 비참한 독립운동사이던가. 살을 에는 추위속에 메마른 흙바람만 부는 만주벌판의 거친 흙속에 석달 열흘 뒹굴어 다 헤진 무명바지 저고리만 걸치고 거지 중의 상거지 몰골을 한 채 눈알만 번들번들거리는 살육과 분노에 포효하는 이리떼 같은 독립운동가들이었다.

황량한 만주 벌판에서 왜군의 총칼 아래 하나둘 비참하게 죽어 간 운룡의 마을 친구들, 고향에 두고 온 아버지, 어머니, 형, 누나를 부르며 땟국에 절고 헤지고 주린 배를 움켜쥐고 추위에 떨면서 아무 것도 해준 것 없는 조국의 미래를 위해 그들은 그렇게 청춘을 바쳤다. 쓸쓸한 만주 땅에 죽어 넘어진 이들의 이름이나 누가 기억할까. 시체를 거둘 겨를도 없이 도망 다니는 동료의 뒤에 남겨져 들짐승에게 뜯기고 백골만 이리저리 바람따라 흩어져갔다. 운룡과 함께 고향을 떠났던 풋풋한 청춘의 친구들 넷도 모두 그렇게 허망히 사라졌다.

운룡에게 이제 부귀영화는 있을 수 없는 문자가 되고 말았다. 만주로 끌고 와 비참하게 죽어간 동무들의 백골이 벌판에 뒹구는 동안은 운룡에게 호의호식이란 영원히 있을 수 없는 일이 되었다.

그로부터 운룡은 일본 경찰에 쫓겨 반도의 북쪽과 만주 땅을 넘나들며 이 산에서 저 산으로 몸을 옮기며 독립군으로 생활하게 되었으니 만주, 소련, 백두산, 묘향산 등지로 도피하며 해방을 맞기까지 얼추 20여년을 산에서 지내게 된다. 주로 공사판, 금점판, 산판 등을 돌아다니며 막노동으로 연명하였고 때로는 산속에서 여러 가지 약초를 채취하여 백여 리 떨어진 저잣거리에 내다 팔아 양식을 마련하기도 하였다.

운룡은 자신이 모화산 부대원 지을룡이라는 사실을 감추면서도 고치기 어려운 병에 걸려 죽어가는 환자들을 수도 없이 살려냈다. 사람들은 그가 우는 아이의 울음도 멈추게 할 만큼 용맹무쌍한 독립군 지을룡이란 사실을 알 수가 없었다. 그저 아무리 중한 병에 걸린 환자라도 침으로, 뜸으로, 혹은 이해할 수 없는 신기한 처방으로 단번에 살려내는 신선과도 같은 ‘청년 도사’로 알고 있을 뿐이었다.

출처: http://kor.theasian.asia/archives/3132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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