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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산 김일훈 68] 수송동 혈액은행 시절

작성자
인산한의원
작성일
2023-11-07 12:53
조회
622
서울 종로구 수송동에 종전까지 혈액은행으로 사용하던 건물이 있었다. 개인 소유의 그 건물은 대지 2백여 평에 연건평 60여 평의 2층 구조였는데, 소유자가 그 건물을 담보로 하여 외환은행에서 빌린 대출금을 갚지 못하여 경매에 처해지게 되었다. 그런데 당시의 외환은행장이 인산에게서 입은 개인적인 은혜를 갚는다는 뜻에서 경매 신청을 뒤로 미루고 인산으로 하여금 3년간 그 건물에 들어가 살도록 조처해 주었다.

인산이 그 건물에 처음 입주하였을 때에는 관리의 손길이 미치지 않은 지 오래되어 흉물스럽기 그지없었다. 외벽의 타일이 군데군데 떨어져 나간 것은 고사하고, 건물 여기저기에 금이 가고 문짝마다 경첩이 망가져 제대로 닫히지도 않았다. 그러다가 인산이 들어가 살면서부터 틈나는 대로 손볼 것은 고치고, 또 인산을 찾아오는 사람들의 발길이 잦았으므로 자연적으로 흉물스러운 때는 벗게 되었다.

그런데 집을 비워주고 떠나가야 했을 원 소유자의 가족들이 몇 개의 방을 차지한 채 그대로 그 건물에 머물고 있는 것을, 법적으로 권한이 없었던 인산은 인정상으로도 매몰차게 할 수 없어 그냥 묵과하며 지냈다. 그러구러 2년이 다 되어가던 1972년 무렵이었다.

누구에게 얘기를 듣고 찾아오는지 인산에게는 매일 평균 30~40여명의 환자나 그 가족들이 찾아왔다. 서울에 사는 사람들뿐 아니라 전국 방방곡곡에서 그가 귀신같이 병을 낫게 하거나 불구자들을 정상인으로 만들어준다는 소문을 듣고 찾아오는 사람들이었다. 앞에서도 그 비슷한 정황을 설명한 적이 있지만, 인산을 찾아오는 사람들은 대부분 죽음의 문턱에 도달하여 절망에 빠져 있는 중환자들이었다.

병원이란 병원, 의원이란 의원은 모두 찾아다니며, 병을 고칠 수 있다면 안 해본 일이 없는 사람들이었다. 귀신의 장난으로 병이 들었다 하여 굿을 해본 사람도 있었고, 조상의 묘를 잘못 쓴 탓이라 하여 두세 번씩 조상의 묘를 이장했던 사람도 있었다. 그야말로 어떤 돌팔이한테 들었는지 열 손가락에 불을 붙이면 병을 고칠 수 있다는 말을 듣고 소지(燒指) 공양(?)을 했던 사람도 있었다. 아무튼 그들에게 있어서 인산은 마지막으로 기댈 구원처요, 최후로 자신의 생명을 의탁할 희망처였다.

기실 제도권이라 일컬어지는 이 나라의 의료계에서 보자면 인산은 한낱 무자격자에 불과했다. 나라의 보건 행정을 맡은 사람도 아니었고, 어느 병원에 적을 두고 하다못해 원무(院務)를 처리하는 사람도 아니었다. 제약회사의 말단직에라도 있어본 적이 없고, 더더군다나 국가에서 발행하는 의료 분야의 자격증이나 면허를 소지하고 있는 것도 아니었다.

사회인으로서 내세울 게 없는 것은 비단 그런 것들만이 아니었다. 가진 바 재산도 없었고, 공히 인정받은 명예도 없었다. 당시에는 ‘돈은 없어도 살 수 있지만, 백(뒤에서 받쳐주는 세력이나 사람)이 없으면 살 수 없다.’는 말이 풍미하던 때이다. 인산에게는 그런 ‘뒷배’도 물론 없었다. 머리끝부터 발끝까지 철저한 야인(野人)이었고, 서민이었다.

그런데 다 죽어가는 사람들은 그를 찾아와 울며불며 매달리고, 막무가내로 자신 또는 자신의 가족을 살려 달라고 애원하는 것이었다. 보다 수월하게 치료할 수 있을 시기에는 병원이다 한의원이다 간판이 그럴 듯한 곳만을 찾아다니다가, 마침내 어디서고 살릴 가망이 없다고 하면 그제야 인산을 찾아오는 사람들. 그중에는 내일 모레 죽을 날을 앞두고 있으면서도, 기껏 제 발로 찾아왔으면서도 인산의 능력을 떠보고 그의 인간됨을 의심의 눈초리로 살피는 사람도 없지 않았다.

그럴 때면 냉정하게 돌아앉아 버리고 싶은 마음이 일기도 했지만, 어리석은 중생의 한계가 그것밖에 더 되겠느냐고 생각을 고쳐먹고 애오라지 환자를 긍휼히 여기는 마음 하나로 그들을 대하는 인산이었다. 인산이 일러준 처방대로 성실히 치료에 임하여 소생한 사람들은 언제 그렇게 울며불며 매달렸던지 까맣게 잊은 것처럼 소식을 끊기 일쑤였고, 끝끝내 인산이 일러준 처방을 믿지 못하여 실행하지 않았다가 죽거나 잘못되면 원망의 화살을 인산에게 집중하였다. 세상인심이란 게 그랬다. 그래도 인산은 자신이 타고난 사명을 저버릴 수 없었다.

‘대세(大勢)를 바로잡는 일도 시급하고 중요하지만, 역시 내 눈으로 보게 되는 당면 환자들 한 사람 한 사람의 치료도 경시(輕視)할 수 없다.’

그렇게 생각한 인산은 자신을 찾아오는 환자들을 전심전력으로 구제하는 한편, 보다 많은 양의 오핵단을 제조하기 위해 돈이 손에 들어오는 대로 투입하였다.

혈액은행으로 사용하던 허름한 그 건물과 터는 일종의 제약 공장 본부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이미 20세 청년이 된 장남과 차남, 14세의 막내아들에 이르기까지 총동원이 되어 인산의 제약 업무를 도왔다. 오래전에 참옻나무 껍질과 유황을 먹여 기른 집오리의 간과 음양곽을 먹여 기른 토종 염소의 간은 확보되어 있었기에 토종 개ㆍ돼지ㆍ닭을 먹여 필요한 약재를 충당해야 했다. 인삼과 유황을 섞은 사료를 먹여 키우는 개는 수송동 건물 뒤쪽 공간에서 인산이 아들들과 직접 길렀고, 부자(附子)를 먹여 기르는 돼지와 독사 구더기를 먹여 기르는 닭은 도봉동에 사는 김만원이라는 사람에게 위탁하여 길렀다.

서울 도심 한복판에서 개를 10여 마리씩이나 키운다는 것은 보통 일이 아니었다. 그것은 특히 주변에 사는 이웃들의 구구한 원성을 들을 수밖에 없는 일이었다. 동물 분뇨의 냄새가 워낙 지독했기 때문이었다. 그것은 주택 밀집지역이 아닌 도봉동 쪽에서도 마찬가지였다.

김만원 씨는 성황당 근처의 자기 집에서는 돼지를 먹였고, 백운대 쪽으로 2Km쯤 들어간 곳에 설치해 놓은 농막에서는 독사와 구렁이에 구더기를 내어 닭을 먹여 길렀다. 죽은 독사의 몸뚱이에 버글거리는 구더기는 자칫 방심을 하면 모두 도망을 가버리기 때문에 장독 뚜껑을 밑에 받치고 광목으로 감싸놓아야 했다. 그 구더기를 먹은 닭은 얼마 안 가 독(毒)과 열(熱) 기운이 몸 안에서 기승을 부리게 되고, 그 여파로 머리털이 몽땅 빠지게 된다. 그러나 그 기운이 얼마나 센지 일반 닭들은 그 닭들의 싸움 상대가 되지 못하였다.

인산의 수송동 제약 공장(?)에서는 그렇게 기른 개ㆍ돼지ㆍ닭을 모두 잡아서 그 간(肝)들을 말려 분말한 것에 미리 만들어 보관해 두었던 염소와 오리의 간 분말을 혼합하여 오핵단 20여 개를 빚었다. 토산 웅담(熊膽)이나 사향(麝香) 등 탁효를 지닌 약재들이 점차 귀해지는 판국이라 오핵단은 암으로 죽어가는 환자들을 위해서는 더없이 소중한 약이 될 것이었다.

그 무렵 폐암에 걸려 죽을 날만 기다리던 사람이 인산을 찾아왔다. 두 번씩이나 발암 부위의 폐엽(肺葉) 절제 수술을 거친 그 환자에 대해 병원에서는 더 이상의 치료 방법이 없다고 손을 들고 말았다는 것이었다. 인산은 선뜻 오핵단 한 알을 그에게 주어 자기가 보는 앞에서 그것을 씹어 먹도록 했다. 그 환자는 사흘 만에 다시 와서 호흡이 편해지고 통증이 가셨다며 자신도 그저 놀라울 뿐이라고 말했다. 그가 오핵단 한 알을 더 먹고 완치되었음은 물론이다.

대학병원에서 간암 진단과 함께 6개월 시한부 인생임을 선고받은 어느 사업가는 자기의 병을 고쳐주기만 하면 자신의 재산 중 절반을 주겠다며 인산에게 매달렸다.

“돈이 암만 많으면 무슨 소용이 있습니까? 그저 제가 다시 건강한 몸으로 여생을 편안히 보낼 수만 있다면, 맨손으로 다시 시작하게 된다 하더라도 여한이 없겠습니다. 선생님의 고명하신 의료술은 익히 들어서 알고 있으니, 저의 병을 고칠 수 있는 방법을 아낌없이 베풀어주십시오. 엎드려 빌겠습니다.”

인산은 간암 환자 특유의 새카맣게 변색된 얼굴빛을 지닌 그에게 오핵단 세 알을 주면서 가지고 가서 복용하라고 했다. 그로부터 보름 만에 싱글벙글 웃으며 그가 다시 찾아왔는데, 얼굴빛이 환했다.

“선생님, 기적 같은 일이 일어났습니다. 지금 막 병원에 들렀다가 오는 길인데, 제 몸에서 아무런 이상을 발견할 수가 없다고 합니다. 저의 간에 자리 잡았던 암세포가 씻은 듯이 사라져버렸다는 겁니다. 이제 와서 한다는 말이 자기네가 오진을 한 것이 아닌가 싶다는 겁니다. 하지만 저는 그렇지 않다고 생각합니다. 오로지 선생님께서 주신 약을 먹은 덕분이라고 얘기했더니, 전혀 믿으려 하지 않더군요. 아무튼 선생님께서는 저를 살려주셨습니다. 저를 이 세상에 있게 한 분이 저의 부모님이라면, 선생님은 제게 제2의 아버지인 셈입니다. 감사합니다. 감사합니다.”

그는 인산 앞에 수도 없이 머리를 조아리며 감사하다는 인사를 했다.
춤이라도 덩실덩실 출 듯한 걸음걸이로 그가 돌아가고 난 며칠 후에 그 환자를 진료했던 의료팀에 속해 있다는 젊은 의사 한 사람이 인산에게로 왔다.
“솔직히 말씀드려서 이번에 말기 간암에서 완치된 그 환자의 일로 저는 상당히 혼란스럽습니다. 저희들의 진단은 분명히 오진이 아니었습니다. 그런데 불과 보름 만에 암 덩어리가 흔적도 없이 사라졌으니……. 혹시 그분에게 주셨던 약을 조금 얻어갈 수 있겠습니까? 저 나름대로 성분 분석을 해보고, 연구도 해보고 싶습니다.”

인산은 진지하고도 솔직한 그의 태도가 마음에 들어 오핵단의 일부를 그에게 떼어 주었다. 얼마 후에 그 젊은 의사는 오핵단의 성분 분석을 해보았다면서 인산을 재차 방문하였다. “성분 분석실에서는 그 알약에서 특이한 성분을 발견할 수 없었다고 했습니다. 특히 암세포를 소멸시킬 만한 성분은 없다는 것이지요. 동물성 지방이 대부분이고, 그 밖에 소량의 당분과 단백질 정도만 들어 있다는데…….”

말기 간암 환자의 암세포가 말끔히 사라진 결과와 오핵단의 성분 사이에는 아무런 인과(因果) 관계를 연결 지을 수가 없다는 게 그의 말이었다. 하지만 원인이 없는 결과란 있을 수 없는 것이기에 자신의 의문은 전혀 해소되지 않았다는 말도 덧붙였다. 그 말을 들은 인산은 빙그레 웃으며 말했다.

“내 그럴 줄 알았네. 자네들 방식으로 성분 분석을 한다 해서 드러날 성분은 그 속에 없다네. 내 한 가지만 물어보겠네. 이 세상에 살고 있는 수많은 생명체들을 한번 생각해 보게. 그것이 인간이라도 좋고 개나 돼지 같은 짐승이라도 상관없네. 그 생명체를 자네들 방식으로 분석하면 어떤 결과가 나오겠는가?”

“…….”
“왜 대답을 못하는가? 질문이 어리석다고 생각하는가? 분명히 자네네 성분 분석실인가 하는 곳에서는 수분이 몇 %이고, 지방이 몇 %이고 하는 따위의 분석 결과를 내놓을 테지. 안 그런가? 그렇다면 그 생명체가 지닌 생명은 어떻게 분석할 텐가? 물리적으로 분석된 분석 결과를 거꾸로 합성하면 그런 생명체를 만들 수 있을까? 말해 보게.”

“…….”
“역시 대답을 못 하는구먼. 그럼 질문을 바꿔서 해보세. 사람의 눈물을 분석하면 어떤 결과가 나올까?”

이번에는 젊은 의사가 대답을 하였다. 무형(無形)의 ‘생명’을 포함하고 있는 생명체에 대한 분석 문제가 아니라 오롯이 물질에 국한되는 눈물에 대한 분석 문제이기 때문에 그랬을 것이다.

“다량의 물과 소량의 염분이 검출될 것으로 생각합니다.”
“그렇다면 한 방울의 눈물을 성분 분석하면서, 그것이 어머니가 자식을 위해 흘린 것인지 어린아이가 떼를 쓰면서 흘린 것인지는 어떤 방법의 분석으로 알 수 있겠는가?”

“…….”
“현대인들 대부분이 지금을 과학 만능 시대로 착각하면서 살고 있지만, 과학에도 분명한 한계가 있음을 인정해야 하네. 오히려 한계를 인정하는 데에 진정한 과학의 의미가 있다고 나는 말하고 싶네. 좋게 말해서 한계인 것이지, 보다 확실히 표현하자면 ‘맹점(盲點)’이라고도 할 수 있지. 그렇게 맹점을 지닌 과학이라는 잣대로 세상만사를 재려 한다면 제대로 재어지겠냐 말일세. 그야말로 비과학적인 태도가 아닐 수 없지 않은가?”

하나하나 단계적으로 풀어 자신이 만든 약은 과학을 뛰어넘는 원리로 만들어진 것임을 암시하려는 인산의 말뜻을 알아차린 젊은 의사는, 얼른 앉은 자세를 고쳐 잡으며 지금까지보다 훨씬 정중해진 태도로 입을 열었다. 그는 역시 명철한 두뇌를 지닌 사람이었다.

“선생님, 선생님께서 만드신 그 약에 대해서 알고 싶습니다. 말씀해 주십시오.”
“자네는 우리나라의 인삼이 세계에서 가장 뛰어난 약성을 지녔다는 말을 들어보았을 테지?”
“예, 그렇다고 알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그 까닭을 알고 있는가? 예를 들어 중국에서 나는 인삼보다 우리나라의 인삼이 우수한 까닭 말일세.”
“글쎄요. 토질 관계 때문이 아닐까 합니다만…….”
“그 말도 아주 잘못된 것은 아니네만, 그보다 더욱 중요한 원인이 있네. 바로 우리 한반도 상공에는 이 세상 그 어느 곳보다 산삼 분자의 밀도가 높기 때문에 그런 것일세. 따라서 인삼에 농축되는 약성의 순도가 그만큼 높아지는 것이지. 아마도 이런 얘기는 처음 듣는 얘기가 될 테지만, 자기가 들어보지 못했다거나 알지 못하는 내용이라 하여 부정(否定)부터 하고 든다면 올바른 태도라고 할 수 없네. 사실 나는 이 세상의 모든 질병을 극복할 수 있는 기본 원리를 알고 있다네. 하지만 이 세상의 속성이란 것에 막혀 그것을 제대로 펼쳐 보이지 못하고 있다네. 내가 알고 있는 세계는 인류 역사상 그 누구도 보지 못했고 또 앞으로도 볼 수 있는 사람이 없을지도 모르네. 그러나 내가 이렇게 얘기하면 세상 사람들은 나를 미친 사람 취급을 하려고 할 걸세. 자기들이 이해할 수 없는 세계는 모두 미친 사람의 세계로 간주하는 것이 그들의 속성이니까. 보편적인 지식을 월등히 뛰어넘는 지혜, 다시 말해 세상 사람들이 기상천외하다고 말할 수 있는 지혜 속에 우주의 원리가 깃들어 있고, 그 원리에 입각하면 인간의 모든 질병을 구제할 수 있건만…….”

젊은 의사는 어느 누구에게도 들어본 적이 없는, 실로 기상천외하다고밖에 할 수 없는 인산의 이야기에 적잖이 관심이 끌렸다. 자신이 의사의 길을 걷는 데에는 ‘병들어 고통 받는 환자들의 병을 고쳐주기 위해서’라는 대승적 명분 하나가 분명히 들어 있기 때문에, ‘인간의 모든 질병을 구제할 수 있는 원리’라는 것에 관심을 아니 가질 수가 없었던 것이다.

“그렇다면 우리나라 상공에 미만(未滿)해 있다는 산삼 분자와 선생님께서 만드신 그 알약과는 어떤 관계가 있습니까?”
“인체의 본래 균형을 바로잡아 주고, 인간의 생명을 우주 질서에 조화되게 함으로써 활기를 극대화시키는 공간 색소 중 산삼 분자와 부자 분자 등의 약 분자를 합성하여 만든 것이 그 알약이라네. 이름 하여 ‘오핵단’이라는 것이지.”
“오핵단이요? 그 알약에 그런 명칭을 붙인 것은 어떤 연유에서입니까?”

“허허, 그 사람 질문이 끝이 없구먼. 내가 그것을 일러준다 하더라도 자네가 이해할 것 같지는 않지만, 그래도 물었으니 대답은 해주지. 방금 전에 말한 공간 색소라는 것은 내가 지어낸 허구(虛構)의 산물이 아니라, 이 지구가 생긴 이래로 실존해 온 것들이라네. 단지 그것의 존재를 아무도 몰랐고, 그랬기 때문에 그것이 우리 인간과 어떤 관계에 있는지는 더더욱 알 수 없었지. 그러나 나는 그것이 눈에 보인다네. 그래서 소년 시절부터 그것을 이용하여 인류의 질병을 구제하고, 종국에는 질병 없는 세상을 구현하기 위해 이 한 몸을 바치겠다는 뜻을 세웠지. 그러나 그 공간 색소 가운데 필요한 약 분자들을 합성해 낼 수 있는 방법이 쉽지 않았네. 그것은 자연적인 상태에서는 이루어지지 않기 때문에 나로서도 별도로 모색해야 하는 후차적 과제였네. 물론 공간 색소를 합성할 수 있는 기계 같은 것이 있을 리 없었지. 인간이 현재까지 이룩한 문명이라는 게 고작 그것밖에는 안 된다는 사실을 참고로 알아두게. 자네들이 내세우는 과학이라는 것도 이 우주 차원에서 보면 그저 어린아이들의 장난에 불과할 뿐이지. 아무튼 나는 궁리 끝에 살아 있는 동물들을 이용하여 생체 내에서 공간 색소의 합성을 도모하기로 하였네.”

그렇게 시작한 인산의 얘기는 다섯 종류의 토종 동물들에게 어떤 약재를 먹이고 어떻게 합성된 공간 색소를 추출하였는지, 그 과정을 자세히 설명하였다. 그러고 나서 이렇게 덧붙였다.

“어찌 보면 원시적인 수단이라고 할지 모르나 별달리 방법이 없었기 때문에 궁여지책으로 다섯 종류 동물의 생체 기능을 이용하여 공간 색소 가운데 필요한 것들을 그것들의 간에 응축시켰고, 그것들을 한데 합쳐 환(丸)을 빚었으므로 오핵단이라는 이름을 붙인 것이라네. 좀 이해가 가는가?”

인산은 설명을 마치며 짐짓 미소 띤 낯으로 젊은 의사의 표정을 살펴보았다. 젊은 의사의 눈빛은 꿈을 꾸고 있는 듯 초점이 뚜렷하지 않았다. 지금까지 들어보지 못한 새로운 세계에 대한 신비스러운 느낌이 그를 사로잡고 있는 것 같았다. 인산의 얘기를 듣다 보니 아닌 게 아니라 우리 인간들의 재주나 기성의 학문, 문명 따위가 아무것도 아닐 것이라는 생각이 절로 들기도 하였다.

“말씀하셨던 대로 제가 이해하기는 어려운 내용인 것 같습니다. 다만 제 자신이 이 세상에 엄존하는 제 현상들에 대해서 너무 무지하다는 생각이 들 뿐입니다. 의학을 배우고 그 지식을 통하여 인간의 질병을 고치겠다는 생각에서 의사가 되었지만, 제가 평생 동안 종사하여야 할 의료 분야에 있어서만도 저는 우물 안의 개구리에 불과하다는 생각을 하게 됩니다. 종종 선생님을 찾아뵙고 가르침의 말씀을 듣고 싶습니다. 그런데 약명에 ‘씨 핵(核)’ 자를 쓰신 것은…… 그 속에 포함된 약 분자가 공간 색소 중의 핵심을 이루는 것이기 때문인가요?”

처음에 인산을 찾아왔을 때와는 사뭇 달라진 태도로 공손히 묻는 젊은 의사를 인산은 여전히 온화한 미소로 바라보며 답하였다.

“대체적으로 그런 의미를 담았다고 할 수 있지. 하지만 그것만이 전부는 아닐세. 나는 그 약을 완성하고서 그 이름을 붙일 때, 그 약과 상대 개념인 살인 핵무기를 생각지 않을 수 없었네. 내가 인류를 질병에서 구제하고자 할 때, 어떤 인간들은 인류를 한꺼번에 몰살시킬 수도 있는 핵무기라는 것을 만들지 않았던가 말일세. 정말 가슴 아픈 일이지. 인간이 동물과 달리 생각할 줄 아는 능력을 지녔다고 내세우지만, 그 능력과 기술을 이용하여 그런 살인 무기를 개발하다니 말이 되겠는가? 자고로 서양이 물질문명을 추구해 온 데 반해서 동양은 정신문명을 더 높이 여겨오지 않았나? 그 살인핵은 서양의 물질문명이 탄생시킨 비극의 씨앗이 되는 것이고, 여기 대한민국의 김인산이라는 사람이 만든 신약(神藥)은 인류가 직면하게 될 온갖 괴질과 난치병을 낫게 할 활인핵이 될 것이네. 그런 의미에서 그 약 이름에 ‘핵’이라는 글자를 취한 것이라네.”

젊은 의사는 그날 많은 것을 깨닫고 돌아갔다. 오핵단을 물리적으로 분석한 자신이 얼마나 어리석은지를 깨달았고, 자신이 배워온 현대 의학이 얼마나 형편없이 부족한 것인가도 비로소 알게 되었다. 자신이 속한 의료팀에게 말기 간암 진단과 함께 6개월 시한부 생명임을 선고받았던 환자가 오핵단 세 알을 복용하고 완치가 되었다는 사실을 인정하였고, 의사로서 자신이 공부해야 할 새로운 분야가 무궁무진함을 발견하였다. 그리고 ‘인산’이라는 사람의 실체를 확연히 알 수는 없지만, 그가 ‘인간의 질병과 치료에 관해 신에 버금갈 만한’ 능력을 지니고 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막연하게나마 갖게 되었다.

가세가 기울어 소유했던 집마저 남의 손에 넘어가고 그 집에 빌붙어 사는 신세로 전락한 수송동 혈액은행 건물의 원 소유자 가족들은 악에 바칠 대로 바쳐 있었다. 염치와 경우를 외면하고 살기로 한 것은 이미 오래전의 일이었는지 몰라도, 이제는 숫제 악함으로 세상살이에 대처하기로 한 것처럼 행동했다. 딴에는 인산이 법적으로 그 건물 소유권에 대해서 아무런 권한이 없다는 것을 빌미삼아 버젓이 인산에게 그 건물의 본채를 자기들에게 내놓을 것을 요구하고 나섰다.

처음에 서너 번은 못 들은 체하고 넘어갔다. 집 빼앗긴 설움이 오죽하랴 싶어서였다. 하지만 점잖게 대하는 인산에게 만만한 싹을 보았는지, 그해(1972년) 초겨울에 들어서면서부터는 몹시도 그악스럽게 굴었다. 당장 그 집에서 나가라는 것이었다. 인산이 찾아온 환자들을 보고 있거나 말거나, 시도 때도 없이 온 식구들이 몰려와 난동을 부리기까지 했다. 참다못한 인산이 그 집 아들들을 불러다 앉혀놓고 호되게 꾸지람을 하였다.

“대체 너희들이 양심이 있는 사람들이냐? 재작년에 내가 이곳에 처음 왔을 때에는 당장 갈 곳이 없어서 그러니 눈 딱 감고 사정 좀 봐달라고, 그러면 몇 달 내에 살 곳을 구해서 나가겠노라고 하더니만, 이제 와서는 날더러 본채를 비워 달라고 생떼를 쓰니 말이 되느냐? 만일 앞으로 또 한 번 행패를 부린다면 그때는 나도 할 수 없이 은행 쪽에 얘기해서 집달리를 동원해서라도 강제로 쫓아버릴 테니 그리 알아라.”

하지만 야비하게 반들거리는 눈빛으로 인산의 눈길을 맞받아치던 그 아들들은 죄송해 하기는커녕 도리어 득의만만한 태도를 취했다. 마치 칼자루는 자기들이 쥐고 있다는 것을 시위하기라도 하듯이.

“영감님께서 그렇게 나오신다면 우리에게도 생각이 있습니다. 나중에 후회하지는 마세요.”
생각 같아서는 그렇게 이죽거리는 젊은 놈의 귀뺨이라도 한 대 후려치고 싶었지만 꾹 참고 그냥 돌려보낸 인산이었다.

그로부터 이틀이나 지났을까, 평범한 가정주부로 보이는 아낙네 한 사람이 찾아 들어와 다짜고짜로 ‘체한 것 같으니 중완에 침 한 방 놔 달라.’는 것이었다. 태도가 어딘지 미심쩍은 데다 환자 스스로 침 자리를 정해 침을 놓아 달라는 바람에 인산은 어처구니가 없어서 ‘별 이상 없으니 그냥 돌아가라.’고 하여 돌려보냈다. 천박한 몸짓으로 치맛고름을 치켜 올리며 때마침 윗목 쪽에 누워 쑥뜸을 뜨고 있는 환자를 세모눈으로 흘낏거리던 아낙네는 ‘내 원 참…… 침쟁이 할아버지가 침을 안 놔주고 사람을 내쫓기부터 하니…….’ 어쩌고 하면서 나가버렸다.

그러고 나서 5분도 채 안 되었을 때였다. 건장한 체구의 남자들 네댓 명이 들이닥쳤다. 그중 한 사람이 경찰 신분증을 인산의 눈앞에 내밀었다. 나머지 사람들은 재빠른 동작으로 방 안의 여기저기를 뒤지기 시작했다. 카메라 플래시가 터졌다. 신문기자가 그들과 동행했던 것이다. 오핵단이 담긴 봉지와 뜸쑥, 침구(鍼具) 등이 증거물로 압수됐다.

“면허증이 있으십니까? 없으시죠? 영감님을 무면허 의료행위에 의한 의료법 위반 혐의로 연행하겠습니다. 저희와 함께 경찰서로 가주시죠.”
하릴없이 그들을 따라나서는 인산의 가슴속에서는 복잡한 감회가 마구 엉켜들고 있었다. ‘참으로 모진 세상이로구나. 내 일찍이 인간세상에서 어떤 대접을 받으려 한 적은 없지만, 목숨 걸고 되찾은 내 나라에서 이런 핍박을 받게 되다니…….’

인산은 경찰 지프차 뒷좌석에 앉아 지그시 눈을 감았다.
‘무지몽매하기로는 젖먹이 어린애 같을 이들에게 무슨 말로 나를 설명해야 한단 말인가!’

그런 인산의 속생각을 아는지 모르는지 옆에 탄 형사 한 사람이 경망스럽게 떠들었다.
“점잖게 생긴 영감이 어쩌다 그런 짓을 하셨는지……. 아, 약물이 들어 있는 주사도 아닌 맨 침을 찌르고 쑥 불로 살갗을 지진다고 병을 고칠 수 있겠소? 멀쩡한 사람…… 없던 병도 생기겠소. 하기는 돈 들고 이런 영감 찾아다니는 사람들이 더 바보지 뭐. 하여간 세상에 먹고 사는 방법도 가지가지라니까…… 쯧쯧.”

불현듯 눈을 뜨니 차의 앞 유리창 너머로 종로경찰서의 정문이 보였고, 위병 근무를 서고 있는 경찰관의 모습도 보였다. 하늘은 첫눈이라도 흩뿌리려는지 무거운 잿빛으로 아주 낮게 내려앉아 있었다.

출처: http://kor.theasian.asia/archives/3076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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