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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산 김일훈 61] ‘운명’…두살배기 윤수 남기고 떠난 아내 장영옥

작성자
인산한의원
작성일
2023-11-07 12:48
조회
267
인산의 아내 장영옥은 가녀린 몸에도 정신만큼은 평안도 출신의 여성답게 강인하였다. 어린 나이에 천하에 다시 없을 특이한 남편을 만나 그의 등 뒤에서 온갖 신고(辛苦)를 겪으면서도 불평 한마다 발하는 법 없이 묵묵히 감내하며 지아비를 따르고 섬겨온 여성이었다.

그녀는 몇 해 전, 그러니까 계룡산 서문달 쪽에 살 때 단오 그네를 뛰다 사고를 당한 일이 있었다. 그네라면 어릴 적 고향 마을에서부터 뛰던 것이라 그녀에게는 조금도 무섭거나 낯설지 않았다. 발을 굴러 서서히 까마득히 높은 곳에 매달려 늘어진 그네의 줄을 그대로 허공에 띄워 가는 진자(振子) 운동의 추(錘)로서 바람을 가르는 맛은 천상의 유희였다.

세상이 발아래에서 아름답게 펼쳐지고 이마에 맺힌 땀방울에 바람이 닿을 때 하늘이 점점 다가와 자신을 그 하늘 속으로 ‘풍덩’ 하고 내던지는 듯한 정점(頂點)의 느낌은 형언하기 어려운 즐거움을 그녀에게 주었다. 그러나 그 애타게 짧은 순간이 지나가면 등 뒤로 까마득히 추락하는 순간이 또 이어지는데, 하늘 속 그네 위에서만 그녀는 만 가지 속세의 유정무정을 모두 벗어던지고 자유로운 한 영혼이 될 수 있었다. 인산은 치맛자락을 펄럭이며 그네를 뛰는 아내의 모습을 한두 번 본 적이 있는데, 그때 아내의 어디에 그런 담력이 있었는지 모를 일이라고 생각하는 동시에 ‘참 아름답다’는 생각을 가졌었다.

그런 인산의 아내가 그네를 뛰다가 큰 사고를 당한 것이었다. 누군가 그네 줄을 미리 반쯤 잘라놓았고 그 사실을 모르는 그녀가 그네 위에서 까마득한 공중으로 치솟았을 때 갑자기 그네 줄이 끊어졌고, 그 바람에 그녀는 그만 땅바닥으로 떨어지고 말았다. 그 장소에 있던 모든 사람들은 그녀가 죽었을 것이라고 판단했으나, 아직은 때가 아니었던지 그녀는 기절한 상태에서도 숨을 쉬고 있었다.

그녀는 창자가 파열되는 중상을 입었으나, 불행 중 다행으로 머리를 다치지 않아 목숨만은 보존할 수 있었던 것이다. 소식을 듣고 달려간 인산의 응급조치와 뒤이은 치료로 인산의 아내는 몇 달 뒤에 병석을 털고 일어나 다시 일상생활을 하게 될 만큼 회복되었다.

아내가 입은 내상(內傷)이 워낙 중하다는 것을 잘 알고 있는 인산은, 아내가 결국은 그 어혈로 인해 죽게 될 것이라는 것을 감지할 수 있었기에 어떻게 해서든지 아내를 치료하여 그 생명을 연장시키고 싶었다. 그러나 인산의 쑥뜸 권유에도 그녀는 쓸쓸한 미소를 띠며 ‘그렇게까지 억지로 생을 이어가고 싶지는 않아요. 염려하지 마세요’라며 뿌리쳤던 것이다.

그녀는 그렇게 다쳤다가 회복된 이후에도 자신의 몸을 돌보지 않았다. 산골에서의 살림살이인지라 집 안에서보다 바깥에서의 일이 더 많았다. 손바닥만 하게 일군 밭에서 곡식과 채소를 가꾸는 일, 산에 가서 나무를 해오는 일이 모두 그녀에게는 힘에 부치는 노동이었다. 그녀는 자기 몸이야 부셔져도 그만이라고 생각하는 듯, 늘 억척스럽게 일했다. 그러던 중에 셋째 아이를 임신하여, 이제 그 해산의 때가 다가오고 있었던 것이다.

인산은 아내의 배가 불러 감에 따라 마음 한켠이 어두워져가는 것을 피할 수 없었다. 천하에 못 고칠 병이 없다고 자처하는 의자(醫者)로서 죽어가는 아내를 속절없이 바라보고만 있어야 하는 고통이 얼마나 큰 것인지는 아무도 모를 것이었다. 비단 이때뿐이 아니었다. 아내와 함께 산 지난 10여년간, 인산은 줄곧 아내의 짧은 명줄이 그 끝을 보일 날이 다가오고 있다는 안타까움과 애처로움을 지닌 채 살아왔다.

행여 그 명줄의 길이를 늘려볼 수 있지 않을까 하는 한가닥 희미한 희망의 끈을 놓지 못하고 종종 고통스런 쑥뜸을 권유하기도 했으나 이 세상에 애착이 없는 아내는 의지를 보이지 않았다. 정해진 숙명을 바꿀 수는 없는지 약하디 약한 생명력으로 간신히 버티던 아내는 셋째 아이를 뱃속에 가지고 키움으로써 간신히 남아 있는 체내의 생명의 기운을 다 소진해가게 될 수밖에 없을 것이다.

아내의 ‘정해진 죽음의 순간’이 코앞으로

인산의 아내 장영옥은 어느덧 30살이 되어 있었다. 일찍이 평안북도 구성군 천마면의 인동 장씨 댁에서 열네 살 난 아내를 처음 보았을 때 감지했던 ‘정해진 죽음의 순간’이 코앞으로 닥쳐왔다는 사실 앞에서 인산은 멀쩡한 정신으로는 견딜 수 없었다. 아니 어쩌면 하늘 아래 독존자인 그가 이 세상을 구하긴커녕 아내의 운명 하나조차 바꿀 수 없다는 현실이 너무 고통스러웠는지 모른다. 이 세상에 써먹을 수도 없는 지혜가 다 무슨 소용이란 말인가. 삼라만상을 유리알처럼 비춰보이는 자신의 머릿속을 술독으로 망쳐놓고 싶은지 내키는 대로 술을 퍼마시며 지내왔다. 술에 취해 혼곤히 마비되면 다 잊을 수 있으리.

기해(己亥, 1959)년 여름에 인산의 아내 장영옥은 3남 윤수(侖壽)를 출산하였다. 그들 부부에게는 또 하나의 소중한 자손이 생긴 것이지만, 그 출산의 여파로 그네에서 떨어질 때 파열되었던 소장(小腸) 부위가 다시 파열되어 산모는 산후 조리의 자리에 그대로 몸져눕고 말았다. 산모의 나이는 31세, 아직 구만리 같은 인생길을 앞에 두고 있는 청춘의 나이였다. 인산은 마침내 올 것이 오고야 말았다는 느낌 속에서 머지않아 사별하게 될 아내가 불쌍했고, 이별의 예감은 가슴을 후벼 파는 아픔으로 다가왔다.

이미 온몸의 진액이 다 말라버린 어미에게서 젖 한 방울인들 나올 수 있으랴. 갓 태어난 3남에게 어미의 젖 한 번 제대로 물리지 못하는 형편이었으니, 갓난아기도 가련하고 굶주린 갓난아기를 봐야 하는 어미도 가련하고 그 모습을 지켜볼 수밖에 없는 아비도 가련했다.

인산이 누구이던가? 이 세상에 못 고칠 병이 없고, 눈앞에 둔 죽음에 속절없이 끌려가던 수많은 환자들을 살려낸 신의(神醫) 아니던가? 그러나 정작 자신의 아내가 죽음을 향해 한 발 한 발 다가서는 운명은 무력하게 방관할 수밖에 없었다. 그것이 무릇 생명의 속성인 것이다. 살고자 하는 사람은 살 길을 찾아 부지런히 움직이고 무심한 사람은 자신의 생에 아무런 미련이 없다. 인간의 목숨은 파리 목숨과 같아 어떨 때는 한없이 질긴 것 같아 보이면서도 어떨 때는 속절없이 허망히 끊어지니 스스로 붙잡기 위해 노력하지 않는 생명을 남이 대신 붙잡아 줄 수 없는 것이다.

인산의 아내는 육신의 편안함이나 삶에의 애착이 없었다. 그저 특별한 존재 인산을 만나 힘든 삶을 꾸려가고 있을 뿐이었다. 가장이 경제를 돌보지 않으니 연약한 몸으로 험한 산속에서 나뭇짐을 해오고 주인 없는 산속 자갈밭을 일궈 입에 풀칠하며 육신이 상해가든 말든 아랑곳하지 않고 몸이 부서져라 일을 하곤 했다. 인산인들 사랑하는 아내를, 자식들의 어미를 그렇게 쉽게 놓아 보내고 싶을 리는 없었다.

그러나 몇 번의 권유에도 불구하고 아내는 고통스런 쑥뜸을 통해 고단한 자신의 생명을 늘리고자 하는 마음이 추호도 없었다. 인산 역시 아내 하나만을 위해 집에 붙어있을 리도 없었고 어떤 면에서는 가족에게는 철저히 무관심한 가장이었던 것이다. 생명을 구원받은 환자 중에 돈 많은 이가 있어 어쩌다 보답이라도 하고자 하면 집 없는 처남에게 집이나 하나 사 주던지 하면서 정작 자신의 집은 사달라는 말도 해본 적이 없었다. 집에서 가족이 밥을 먹는지 굶는지 몇 달 동안 돌아보지 않은 적도 많았다.

그러는 사이에 치료의 적기(適期)는 지나갔고, 3남을 출산한 때로부터 1년 가량 지난 경자(庚子, 1960)년 여름에 인산의 아내 장영옥은 세 아들을 번갈아 보며 하염없는 눈물을 흘리다가 눈도 감지 못한 채 숨을 거두고 말았다. 이때 장남 윤우는 아홉 살, 차남 윤세는 여섯 살, 3남 윤수는 두 살이었다. 월남한 장영옥의 유일한 혈육으로는 오라비 장영봉이 전북 진안에 살고 있었으나, 끝내 임종의 자리에 나타나지 않아 가는 사람의 마음에 또 하나의 한을 더하게 되었다.

아내 잃은 슬픔을 술과 시로 달래며

삼봉산의 초목들과 산짐승들은 물론이고, 흐르는 계곡물조차 그녀의 죽음을 슬퍼하며 애통하게 우는 듯했다. 인산은 아내를 영영 떠나보내는 슬픔을 술과 시로써 달래며, 살던 집에서 서너 마장 떨어진 양지바른 산기슭에 터를 잡아 아내를 장사지냈다. 한 동네에 사는 임상윤이라는 사람이 자신이 소유한 산에 무덤을 써도 좋다고 하여, 그 산 경계 안에서 앵소(鶯巢, 꾀꼬리 둥지) 형국의 터를 찾아 묘를 쓴 것이었다.

일찍이 17년 전에 아내로 맞을 장영옥을 처음 보는 순간 인산의 마음을 무겁게 짓눌러 왔던 그 단명(短命)의 그림자를 걷어낸다는 것은 불가능의 영역에 속한 일이기도 했지만, 무슨 까닭에서인지 고인(故人) 스스로가 극구 그 숙명을 받아들이는 쪽으로 발걸음을 했다는 게 인산으로서는 내내 안타까웠다. 홀로 남은 삼봉산 살구쟁이 마을의 누옥(陋屋)에까지도 밤마다 목에서 피가 나도록 운다는 두견새의 울음소리가 들려왔다. 차마 저승길로 떠나지 못하고 인산과 세 아들의 곁을 떠도는 장영옥의 혼백이 두견새의 울음소리에 실려 있는 것만 같았다.

얼마 후 인산의 옆집에 살던 욱경 아버지 최동규 친구가 이사를 가버렸다. 젊은 새댁이 갓난아기를 두고 죽어 부정탄다며 떠난 이웃집 빈 자리는 열 댓 집 가량 살던 조그만 산속마을을 더욱 황량하게 만들었고 슬픔만이 가득한 운룡의 가슴을 한없는 비애로 가득차게 만들었다. 운룡은 슬픔뿐인 시 한 수를 지었다.

‘단장아측 단정우(斷腸兒側 斷情友)’ 아버지의 창자를 끊는 불쌍한 아기 옆에 친구가 우정을 끊고 가버리고 ‘함소화전 함루인(含笑花前 含淚人)’ 방긋방긋 웃고 있는 아기 앞에 6살 9살 짜리 형은 울고 있구나.

14세의 어린 나이에 부모가 정해 주는 대로 21세 연상인 인산과 혼약을 하고, 그 몇 년 뒤에 인산을 따라 나섰던 장영옥. 전 우주를 한 가슴에 품었기에 인간 세상에 속하기 어려웠던 남편을 그림자처럼 따라다니며 온갖 고초를 겪으며 살았던 그녀. 그녀는 한 여인으로서 부귀영화는커녕 평생 집 한칸 없이 떠도는 인산을 따라 고생만 겪다가 아직 철모르는 어린 세 아들을 이승에 남겨둔 채 차라리 죽음을 편히 여기며 삼봉산 기슭에서 흙으로 돌아갔다. 인산과 부부의 연을 맺게 된 것에서부터 죽음에 이르기까지 모든 것이 기구했고 운명적이었다.

인산은 혹독한 고생을 겪으면 혹시 아내가 요절(夭折)을 면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는 일말의 기대가 물거품이 되고 말자, 살구쟁이에서의 생활을 정리하기로 마음먹었다.

장영옥이 사라진 살구쟁이 집은 이루 말할 수 없이 비참했다. 인산은 술로 세상을 잊고 싶어했고 아이들은 엄마 손길이 없어 삶의 곤궁함은 이루 말할 수 없었다. 갓난 아기는 배 고프면 그저 울어대었다. 인산은 이 때 살구쟁이에서 삼남 윤수의 울음소리에 피가 맺혀 이후 죽는 날까지 어디선가 어린 아기의 울음소리만 들릴라치면 가슴이 찢기는 통증을 느끼곤 했다.

3남 윤수의 사주

인산은 삼남 윤수의 생년월일로 사주를 짚어보고 대학자에 천재의 사주로 활인성이 있어 천을귀인이라 의사의 길을 가면 많은 생명을 살릴 수 있는 운명이었으나 고생을 피할 수 없음을 알았다. 운룡의 이웃에 한 과부가 살고 있었다. 홀애비 3년이면 이가 서말이고 과부 3년이면 깨가 서말이라고 이 여인은 먹고 살만한 돈은 있으나 의지가지 하나 없는 몸이라 피부가 백옥같고 얼굴에 귀한 티가 흐르는 어여쁜 인산의 삼남을 양자로 삼고 싶어했다.

그녀는 어미없는 오막살이에서 굶기를 밥먹듯 하는 어린 아기를 보며 여러 번 인산에게 청을 넣었으나 번번히 거절당했다. 얼마 후 대처로 이사 가는 날 그녀는 여덟살 어린 형아 등짝에 업혀 지내는 어린 것이 너무 불쌍하기도 하여 마지막으로 인산을 찾아 간청하였다. 이대로 내버려두면 아기는 제대로 크지도 못하고 굶어 죽을 수도 있을 텐데 자기가 잘 키워줄 테니 아이를 달라고 눈물을 흘리며 애원했다. 그러나 인산은 언양 김씨 아이를 남에게 주어서 타성받이로 만들 수는 없었다. 마지막 이사 가는 날까지 인산은 거절했고 여인은 걸음을 돌릴 수밖에 없었다.

서울에서는 4.19 학생의거로 이승만 정권이 물러가고 장면(張勉) 내각이 출범하였으나, 연일 어지러운 소란이 일고 있을 때였다.

함양 삼봉산 살구쟁이에서의 삶을 정리하고 서울로 거처를 옮기기로 작정한 인산은 약 한달간의 일정으로 서울에 다녀왔다. 세 아들을 이웃인 임상윤씨 집에 잠시 맡겨둔 상태에서의 행보였다. 살구쟁이에 돌아와 보니 첫돌을 갓 지난 3남 윤수가 심한 배앓이로 몹시 위중한 지경에 처해 있었다. 젖도 떼기 전에 어미를 여읜 윤수는 주로 임상윤씨의 딸 순덕(당시 열서너 살)의 등에 업혀 지내는 시간이 많았는데, 젖을 제대로 먹지 못해 비쩍 마른 몸이 종잇장처럼 가벼웠다.

아직 말을 배우기 전이라 의사 표현이라고는 작은 새가 지저귀듯 연약한 소리로 옹알거리다가 힘없이 우는 게 고작이었다. 위로 두 형이 있었지만 그 애들도 아직 어린아이이기는 마찬가지여서 동생을 보살펴줄 계제가 못 되었다.

윤수를 돌봐주던 순덕이는 배고픈 아이가 울면 달래느라 마른 오징어 다리를 아이의 입에 물려주고는 했다. 그러면 아이는 잠시 울음을 그치고 오징어 다리가 하얗게 불어터질 때까지 입에 물고 쪽쪽 빨았던 것이다. 그러다가 마른 오징어 다리에 붙어있던 기생충알이 아이의 뱃속에 들어가 아이는 급기야 심한 배앓이를 하기에 이른 것이었다. 모두가 어미가 없는 탓이었고, 인산이 아비로서 아이의 곁을 항시 지켜주지 못한 탓이었다.

인산은 3남 윤수의 몰골을 보고 가슴이 미어졌다. 조그만 어린 것이 얼마나 울었는지 목젖이 부어 울음소리도 못 낸 채 쉰 소리만 간신히 새어나오고 있었다. 뼈만 남아 팔다리가 앙상한 아기의 배는 벌레독으로 한껏 부풀어올라 숨 쉬기도 고통스러운지 숨만 헐떡이고 있었다.

인산은 피눈물을 삼키며 일단 목숨은 건져야겠기에 종잇짝처럼 가벼운 아기를 안고 ‘활명수’에다 죽염을 타서 투박한 손가락으로 살짝 찍어 작은 입안에 넣어주었다. 힘이 없어 눈도 못 뜨는 아이였지만 그래도 목숨이 남아 있어 손가락에 발린 죽염을 핥아 목구멍으로 넘기곤 했다. 죽염은 짠 소금이지만 아주 작은 양을 찍어 먹으면 오히려 입안에 단 맛이 돈다.

인산은 밤새도록 쉬지 않고 죽염을 손가락으로 찍어 발라 아이의 입안에 넣어 주는 것을 반복했다. 배가 아파 고통에 찡그리던 아이는 어느 틈엔가 평온한 얼굴로 잠이 들었고 잠결에도 자다 깨다 입맛을 다시며 인산이 발라주는 죽염을 목구멍으로 넘기곤 했다. 아이가 위험한 고비를 넘기자 인산은 아이에게 뭔 가라도 먹이려고 땟국만 쩔어있는 썰렁한 부엌으로 들어갔다. 쌀 한 줌이 있을 리 없는 처량한 살림이었다. 운룡은 간신히 급한 대로 보리쌀 한 줌을 찾아내어 물에 불려 곱게 갈아 보리쌀 미음을 끓였다.

독립운동 시절 백두산, 묘향산 산과 산을 타며 도망자 신세로 짐승보다 못한 생활을 할 때도 생쌀 한 줌 물에 불려 목숨을 연명하던 때가 있었지만 그 때는 해방만 되면 인류 구원의 웅지를 마음껏 펼칠 수 있으리라는 기대가 없진 않았다. 그러나 해방 후 수 세월이 흘러가도 운룡의 신세는 달라지지 않고 굶주린 어린 것에게 먹일 쌀 한 줌도 마련 못한 못난 아비일 뿐이었다. 인산은 잠든 아이의 얼굴을 들여다보며 다시 한 번 살구쟁이에서의 생활을 정리해야겠다는 생각을 굳혔다. 계절은 어느새 겨울을 눈앞에 두고 있는 때로 접어들고 있었다.

돌이켜보니 지리산 북쪽 고을 함양 땅에 발을 들인 것이 어느새 4년이나 되었다. 그중의 태반을 함양에서도 가장 오지에 속하는 살구쟁이에 숨어 살듯 지냈다. 인간으로서 추구할 수 있는 풍요로움이나 복락과는 거리가 먼, 연명하기 급급한 외양의 삶이었지만 인산으로서는 조금도 불편함을 느끼지 않았었다. 내 몸 고달프게 움직여 함지박을 깎아 팔면 조석이야 끓일 수 있었고, 함양 땅 아무 데고 찾아가 쌀가마니를 청하면 쉽게 얻을 수 있을 만큼 덕(德)도 쌓았다.

하지만 스스로 인정하듯 세상에 다시 없을 지혜를 지니고서도, 그 빛을 감춘 채 덧없는 세월을 보내고 있다는 사실에서 느끼는 고통만큼은 견디기 어려웠다. 인간 세상은 하루아침에 이루어지지 않았다. 혹자는 유구하게 흘러온 그 저변의 존재 원천을 ‘역사’라 칭하기도 하고, 혹자는 그것을 ‘전통’이라고 칭하기도 한다. 그 흐름 속에서 인간들은 문화와 문명이라는 것을 구축해 놓고 부지불식간에 배타적인 텃세를 부리며 산다.

수많은 선구자들의 고난, 인산도 예외없이

자기가 경험하거나 배운 것, 들어서 아는 것 이외의 것에 대해서는 알려고도 하지 않고 인정하려 하지도 않는다. 더욱이 그것이 어느 사회 집단의 이익을 침해할 우려가 있다고 판단될 때에는 그 배타성이 한층 더 가멸차게 드러난다. 그렇기 때문에 인류 역사상 수많은 선구자들이 고난을 겪거나 사회로부터 외면을 당했던 것이다.

사회 집단이 무지할 경우, 그것은 그 어떤 폭력보다도 더 위험하다는 것을 사람들은 모른다. 등 따뜻하고 배 불리 먹을 수 있다면, 그것으로 최고의 가치를 구현했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사는 세상. 나와 내 가족만 무사하면 남들이야 어떤 일을 당하든 상관없다는 사람들로 이루어진 세상. 내 밥그릇을 채가려는 것으로 보이는 사람에게는 그가 아무리 옳고 정당한 이유를 지녔어도 이빨을 드러내고 으르렁거리는 사람들의 세상. 세상은 대개 그런 법칙 아래 돌아가고 있다.

그러나 인산의 눈에는 점차 무서운 기세로 인류를 덮쳐 갖은 질병의 횡액으로 인류를 괴롭힐 산업문명의 해악이 보였다. 지금까지 보지 못했던 새로운 질병들이 생겨날 것이고, 인류는 그러한 질병에 대처할 방법을 찾지 못해 속수무책으로 죽어 갈 것이다. 고금동서의 어느 의서에 인류가 산업문명의 폐해로 겪게 될 각종 난치병ㆍ괴질에 대해서 언급해 놓은 적이 있었던가? 그러나 이 사회 속에서 의료기관이라는 명색을 걸고 환자를 치료하고자 하는 사람들이 배운 것은 무엇이던가?

대학교에서 몇 년 공부한 것을 가지고 평생토록 호의호식하고 사회적으로 대접 받으면서 살면 성공한 삶이라고 생각하는 사람들, 인간 세상에 질병이 없어지면 굶어 죽게 되므로 되도록 많은 환자들이 발생해 자기 앞에 줄 서기를 바라는 사람들-그들을 과연 인술을 지닌 의자(醫者)라고 부를 수 있을 것인가?

인산은 평생토록 믿어왔다. 모든 의서들은 시대 상황에 맞게 전면 개편되어야 하고, 국가의 의료제도는 치료가 아닌 철저한 예방을 중심으로 재편되어야 하며, 의료기관과 그 종사자들은 돈벌이에 목적을 둘 것이 아니라 본래적 사명에 새로이 눈을 떠야 한다고. 인산은 알고 있었다. 어느 시점을 정해 그때로부터 태어나는 아기들에게 자신의 예방의학에 바탕을 둔 건강법을 보편적으로 시행한다면 반드시 질병 없는 사회를 이룩할 수 있다는 것을.

사실 엄밀히 말하자면 의료기관이라는 것은 존재하는 한 질병이 없는 세상을 구현하기 위해 끊임없이 그 방향의 길을 가야 한다. 그러다가 궁극적으로 질병 없는 사회가 이루어지면 자연히 소멸되는 것이 자연의 법칙에 부합한다. 그래서 의료기관이란 것이 이 사회에서 필요악이 아니라 불필요악으로 간주되어야 하는 것이 우주 질서의 순리이다.

시장의 장사꾼과 의료인이 달라야 하건만

왜 수많은 의료기관들이 약값이나 진료비를 턱없이 높게 책정해 놓고 자신들의 배를 불려야 하는가? 재벌들은 막대한 금액을 투자하여 그 몇 십 곱절의 이익을 창출하기 위해 의료기관을 세운다. 시장의 장사꾼과 의료인이 달라야 하는 것은, 전자는 이익 추구를 목표로 하는 것이고 후자는 인간의 생명과 건강을 위해 자신을 바쳐야 하기 때문이다.

그런데 사회 구조 속에서 엄청난 착각이 일어났고, 그 누구도 그 착각을 지적하거나 저항하는 일 없이 그대로 인정하며 따라가고 있다. 의사가 다른 직업인에 비해 수월하게 돈을 버는 것이 당연시되고, 환자의 생명이나 건강도 치료비 앞에서는 뒤로 밀리는 현실에 순응하는 사람들이 대다수이다. 인간에게 있어서의 ‘치료받을 권리’는 자본주의 사회의 논리 앞에 맥을 못 추는 것이 현실인 것이다.

인산은 병을 고치는 데 있어서 신과 통한다 할 만큼 신비로운 지혜를 지니고 있었지만, 그의 궁극적인 목적은 그 모든 질병이 있게 되는 원인에서부터 손을 써 예방함으로써 질병 없는 사회를 이루고, 그에 따라 의료기관이나 의사ㆍ약ㆍ처방이 필요 없는 사회를 건설하는 것이었다.

하지만 인산의 그와 같은 생각은 꿈같은 이상론에 불과하다는 평을 들을 수밖에 없다는 것도 그 스스로 알고 있었다. 더욱이 자신의 짧은 생애 동안에 그 목적을 달성할 수 있으리라고는 생각지 않았다. 그래서 인산은 우선 당장 자기를 찾아오는 환자들의 병을 고쳐주는 일도 중요하지만, 그 일은 자신의 생애를 마친 뒤에는 더 이상 할 수 없는 일이므로 자신의 사후에라도 두고두고 인류의 질병을 예방ㆍ퇴치하는 지침을 누구라도 익혀 실행할 수 있도록 기록으로 남겨야 한다는 생각을 하였다.

‘내 작은 육신 속에 담긴 지혜가 기록으로 완전히 옮겨질 수 있다면, 이 육신은 마침내 흙으로 돌아갈지언정 지혜는 남아 아무 걸림 없이 인류의 건강을 위하여 큰 역할을 하게 될 것이다.’

출처: http://kor.theasian.asia/archives/3188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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