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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산 김일훈 57] 공주 마곡사 산판의 지게꾼···불의한 경찰을 혼내다

작성자
인산한의원
작성일
2023-11-06 17:21
조회
283
참나무골에는 기와를 구워내는 기와 가마가 있었고, 인산과 그의 아내는 갓 태어난 장남 윤우와 함께 그곳 기와막 곁방에서 살았다. 날이 밝으면 인근 산판에 나가 하루 종일 소나무나 참나무 장작을 패서 지게로 져 나르는 일로 품삯을 받아 근근이 생계를 이어갔다.

전선(戰線)은 반도의 허리께에서 교착 상태에 빠져 일진일퇴를 거듭하고 있는 동안 일반 백성들은 입에 풀칠이라도 하기 위해 닥치는 대로 일을 해야 하던 시절이었다. 자신을 드러내지 않기 위해 일부러 산골짜기에 들어가 살고 있는 인산으로서는 노동만큼 마음을 편케 하는 일도 없다고 생각했다.

날이 밝는 대로 지게를 지고 산에 올라가 벌목꾼들이 쓰러뜨려놓은 나무 가운데 목재로 쓸 것과 땔감으로 쓸 것을 구분하여, 그중 땔감용 나무를 도끼로 패어 지게에 지고 화물차가 들어올 수 있는 큰길까지 져 나르는 일을 되풀이하는 것이 그의 일이었다.

며칠 동안 팬 장작을 착착 쟁여 쌓아놓았다가 일정 분량이 되면 하루에 열 번 이상씩 큰길까지 지게로 져 내려오는 일이 육체적으로는 꽤 힘든 일이었지만, 무지한 인간들 속에서 부대낌을 당하는 것보다는 훨씬 견디기 수월했다. 손에 못이 박히고 어깻죽지가 떨어져 나갈 듯이 등짐이 무거워도 일한 만큼 품삯을 받아 처자식과 먹고 살 수 있으니 신간은 편했다.

“어이, 김가야! 목도 컬컬한데 막걸리나 한 사발 하고 좀 쉬었다가 하자.”
인산에게 장난기 가득한 말을 건네는 작업 동료는 전용석이라는 사람으로 인산과는 동갑내기였다.
“예끼 이놈, 형님한테 말버릇이 그게 뭐냐? 못된 놈 같으니라고. 인석아, 자고로 윗사람 잘 섬길 줄 알아야 떡이라도 한 조각 더 얻어먹는 법이라는 걸 모르느냐? 허허, 그놈 참…….”

인산은 도끼질을 멈추고 벗어젖힌 가슴팍에 번들거리는 땀을 수건으로 닦으며 전용석에게 응수한다.
“헤헤, 이놈아, 네가 암만 그래도 세상은 내가 네 형님인 줄 다 안다. 네놈이 나한테 고따위로 맞잡이 하는 걸 보면 세상 사람들이 너를 욕하지 나를 욕할 줄 아느냐? ……하기야 네놈의 관상이 어디 산판에서 도끼질이나 할 관상이더냐? 어디 절에라도 들어가서 대웅전에 버티고 앉아 있으면 ‘아이고, 부처님!’ 하고 사람들이 머리를 조아릴 텐데……. 옜다, 이놈아, 잔이나 받아라.”

“허허, 고얀 놈…….”
두 사람은 고된 노동이 주는 피로감을 그렇게 실없는 농담을 주고받으며 잠시 동안이라도 잊는 것이었다. 전용석은 머리에 든 것이 없는 것에 비하면 배포가 크고 호탕한 사람이었다. 인산보다 몇 곱절 이상은 산판 경험이 있는 사람이어서 일하는 요령도 좋았을 뿐더러, 때로는 50여 명에 달하는 산판 노동자들의 주동자 격이 되기도 하였다.

그들이 그렇게 져 나르는 장작과 목재를 공주로 운반하여 판매하는 목상(木商)은 유찬범이라는 사람이었는데, 그는 자본주로서 금전 관계에만 관여하였고 실제 경영은 이봉문이라는 사람이 맡아 하였다. 그들은 인부들의 품삯으로 보통 장작 한 평(坪)-사방 여섯 자에 높이도 여섯 자-을 패서 져 내리면 백미(白米) 한 말 값을 주었는데, 보통 인부가 하루에 한 평 이상의 장작을 패기는 쉽지 않았다. 그래도 인산은 하루에 쌀 한 말 값은 해야 한다고 생각하고 부지런히 일했다.

하지만 일기가 불순하거나 일 자체가 워낙 고되어서 쉬는 날을 제하면 대개 한 달 평균 열흘가량밖에 일을 못하였다. 결국 품삯을 모아서 한 달에 한 번씩 쌀 한 가마니 값을 받는 게 고작이었다. 그러나 이봉문 측에서는 매달 지급하는 품삯에서 으레 꼬투리를 남기고 절반밖에 주지 않으며 이런저런 군색한 핑계를 대기 일쑤였다. 그렇게 해서 밀린 노임이 석 달치 가량 누적되었던 계사(癸巳, 1953)년 봄에 이봉문 측은 산판을 폐쇄하고 철수하여 버렸다. 밀린 임금에 대해서는 이렇다 저렇다 말이 없는 채였다.

전용석은 두 아들과 함께 산판 일을 하였으므로 아홉 달치 품삯을 떼일 판이었다. 대부분의 인부들은 받을 품삯을 염두에 두고 현장의 간이식당에서 외상으로 밥과 술을 먹은 처지였기에 사정은 더욱 딱했다. 간이식당 주인도 인부들에게 외상값을 받지 못할까봐 몸이 달아 있었다. 인산도 간이식당에 셈해 줄 외상값이 있었으므로 노성군(지금의 논산군)에 사는 지인 윤석두씨에게 우선 변통해 외상값을 갚았다.

석 달치 밀린 품삯쯤 별것 아니라고 생각할 처지가 아닌 인부들 가운데 인산을 비롯한 30여 명이 70리 길을 달려가 이봉문에게 밀린 품삯을 지급해 줄 것을 요구하였다. 이봉문은 ‘나는 모르는 일이니 너희들 마음대로 하라’며 배를 내밀다가 그중 험악하게 악다구니를 해대는 인부 몇 명만 따로 불러 몇 푼 쥐어주고는 어물쩍 넘어가려고 했다. 그 사실을 알게 된 나머지 사람들이 순순히 물러날 턱이 없었다.

그들은 이구동성으로 이봉문의 파렴치함을 규탄했고, 정당한 노임 지급을 거듭 요구했다. 이봉문과 인부들 사이에 고성이 오가고 인부들이 쉽사리 물러설 기미를 보이지 않자, 이봉문은 급기야 공주경찰서로 연락을 취해 인부들을 ‘주거 침입자들’로 고발하였다. 그리하여 인부들은 출동한 경찰관들에게 연행되기에 이르렀다.

이봉문은 나름대로 공주 읍내에서 행세깨나 하던 사람으로서 관청 사람들과 가깝게 지내고 있었으므로 경찰이 자신을 비호해 줄 것으로 믿었고, 실제로 경찰관들은 불문곡직하고 이봉문의 집 안에 발을 들여놓은 인부들에게 주거 침입의 혐의를 씌우려 들었다. 인부들은 이봉문의 집 대문을 강제로 열고 들어간 것이 아니라 분명히 안에서 누군가가 열어주어서 들어갔기 때문에 주거 침입의 죄는 성립될 수 없다는 주장을 하였으나, 먹혀들지 않았다.

‘더 이상 소란을 피우지 않고 조용히 돌아가면 문제 삼지 않겠다’는 회유와 엄포를 되풀이하던 경찰관들은 ‘밀린 노임을 받기 전에는 절대로 돌아갈 수가 없다’고 버티는 인부 몇 사람의 따귀를 때리기까지 했다. 아무리 전쟁을 치르고 있는 신흥 국가의 경찰이라지만 법도 질서도 아랑곳하지 않는 철부지 아이들 집단 같았다. 전쟁이라는 어수선한 분위기에서 순진한 일반 시민들 위에 군림하려는 무소불위의 권력 집단이 보일 수 있는 횡포에 지나지 않았다.

인산은 그때 사태를 예의주시하면서 서서히 끓어오르는 분노를 삭이고 있었다. 아직은 자신이 나설 때가 아니라고 생각했기에 참고 있었던 것이다. 그때였다.
“아니 김인산 선생님 아니십니까? 여기에는 웬일로……?”

인산을 알아보고 그렇게 물으며 다가오는 사람의 어깨에는 경찰 간부의 계급장이 달려 있었다. 안면은 있어 보이는데 순간적으로 어디에서 본 사람인지 생각나지 않아 인산은 잠시 그의 얼굴을 뚫어지게 쳐다보았다. 그러다가 생각이 났다. 자주 드나들던 윤석두의 집에서 수인사를 나눈 적이 있는 윤씨 집안의 사람이었다.

“오, 윤 경감이야말로 여기에 웬일이시오? 내가 알기로는 강경경찰서에 계시는 걸로 아는데…….”
“아, 예……. 달포 전에 이곳 수사과장으로 옮겨왔습니다.”

윤 경감은 인산의 손을 잡아끌더니 경찰서 뒤뜰로 가서 조용히 말했다.
“사안은 저도 대충 압니다. 이봉문 그 사람이 원체 꾀가 많은 데다 이악스러운 사람이라서……. 하지만 여기 경찰서장은 물론이고 관내 기관장들이 두루 그와 친분 관계에 있으므로 달리 어쩔 수가 없을 겁니다. 그러니 선생님께서는 괜히 여기 계시다가 망신당하지 마시고 그냥 돌아가시는 게 좋을 것 같습니다. 밀린 임금이야 민사 건이지만, 주거 침입은 형사 건이므로 이봉문이 철회하지 않는 한 우리 경찰로서는 법대로 처리할 수밖에 없답니다.”

인산은 기가 막혔다.
“윤 경감이 나를 염려해 주는 것은 고맙게 생각하겠소. 하지만 엄연한 법치국가인 대한민국의 치안을 책임지고 있는 경찰이 그렇듯 안하무인격으로 횡포를 일삼는 자를 묵인하고 비호한다면 이 나라는 어떻게 되겠소? 내 윤 경감을 귀찮게 할 생각은 없으니, 서장을 만나 담판을 지으리다.”

인산은 윤 경감을 뒤로 하고 다시 경찰서 안으로 들어가 서장실로 향했다. 인산의 의도를 알아챈 전용석도 그 뒤를 따랐다. 그런데 서장실 문 앞에 가니 경찰관 서너 명이 그 앞을 가로막고 들어가지 못하게 하는 것 아닌가.

“이거 정말 일을 크게 만드는군. 당신들이 이런다고 내가 그냥 물러설 줄 아시오?”
인산은 방 안의 서장에게까지 들릴 정도로 대갈일성을 하고는 그길로 경찰서에서 나와 대전으로 향했다.

운암리에서 공주까지는 줄잡아 70리 길이다. 그 사이에 몇 개의 산과 고개가 가로놓였는지 모른다. 예산에서 공주로 가는 버스가 사곡면 소재지를 경유하고 있었으나, 차비를 아끼기 위해 걸어서 공주까지 걸어서 왔던 인산과 인부들이었다. 그런데도 경찰은 정당성 여부를 따져보기도 전에 사회적 약자인 노무자들만 몰아세웠다. 그 꼴을 보고 그대로 둘 수가 없다고 생각한 인산은 충남 도지사를 만나 항의를 해야겠다고 생각한 것이다.

밤을 꼬박 지새며 걷고 또 걸었다. 계룡산을 넘고 유성을 지나 대전에 도착한 인산은 머뭇거릴 짬도 없이 충남 도청에 들어가 도지사를 만났다. 이영진 도지사는 서산 사람으로서 인산과는 이미 면식이 있는 사람이었다. 그는 인산이 자기를 찾아오기까지의 자초지종을 듣더니, ‘도의 행정 책임자로서 매우 부끄럽고 죄송스럽게 생각한다’며 사과하였다. 그러고는 관계 국장을 불러 사건에 대한 진상을 철저히 조사한 후에 보고할 것을 지시하였다.

곧바로 공주 군청에 대한 도청의 감사(監査)가 시작되었다. 그 결과 공주 군청의 산림과장이 이봉문에게 뇌물을 받고 허가된 면적 이상의 과다 벌채를 눈감아준 사실이 밝혀져 파면되었다. 아울러 공주 군수는 부하 직원 감독 소홀의 책임을 지고 좌천되었다.

이 도지사는 내무부에 상신하여 공주 경찰서의 원(元) 아무개 서장에게도 책임을 묻도록 하였으며, 그에 따라 원 서장은 제주 경찰서로 좌천되었다가 별건으로 파면되었다. 그 밖에도 그 사건 관련 공무원과 경찰 수 명이 문책 징계됨으로써 인산이 도지사를 만난 여파는 일단락되었다. 하지만 인산을 비롯한 나머지 노무자들의 밀린 노임은 영영 받지 못하고 말았으니, 인간사회의 도둑은 물건을 훔친 것만 도둑이 아니었다.

후일에 알게 되었지만 당시 공주 경찰서의 원 아무개 서장은 인산이 잘 알고 지냈던 조병옥 박사 계열의 사람이었다. 만일 인산이 그를 만나고자 했을 때 선선히 만나주었더라면 사건이 그렇게까지 확대되지 않고서도 좋은 결말을 맺을 수 있었을 텐데, 한 치 앞을 모르는 게 사람의 일인지라 그런 아쉬움을 남기고 만 것이다.

출처: http://kor.theasian.asia/archives/3119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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