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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산 김일훈 55] 부친 장례를 마치고···’짧은 생애 통해 내가 이룬 결과, 다 볼 순 없겠지만’

작성자
인산한의원
작성일
2023-11-06 17:19
조회
313
인산 역시 아버지와 아내를 계룡산 밑 백암동에 두고 부산에 내려와 있던 처지였으므로 9ㆍ28 서울 수복 직후부터는 틈을 내어 가족에게 다녀오고는 했다. 그 사이에 아버지 경삼 옹과 아내는 인산이 일러주었던 대로 공주의 마곡사(麻谷寺) 부근(충남 공주군 사곡면 운암리)으로 거처를 옮겨 살고 있었다. 마곡사에서 실개천을 하나 건너 ‘참나무골(일명 참나무쟁이)’이라고 부르는 동네의 기와막 방 두 칸을 빌어 지내고 있었던 것이다. 인산이 아버지와 아내를 그곳에 가서 살도록 한 데에는 이유가 있었다.

그러니까 수년 전에 인산은 산세를 보러 마곡사 인근에 갔던 적이 있었다. 계룡산은 공주를 중심으로 할 때 동남쪽으로 40리 상거에 있고, 그 반대편, 그러니까 공주의 서북쪽으로 40리쯤 되는 곳에는 무성산(武城山, 오늘날에는 武盛山으로 표기함)이 있다. 그리고 거기에서부터 서북 방향으로 다시 40리쯤 되는 곳에 금계산(金鷄山)이 있다. 그런데 무성산에서 국사봉ㆍ금계산으로 이어지는 일지맥이 기운차게 흐르다가 멈칫하는 지점에 물이 돌고 있으니[山盡水廻處] 과연 명당 혈처가 맺혀 있을 만했다. 그런데 우리나라의 수천 년 역사가 이어져 오는 동안에는 천문(天文)ㆍ지리(地理)에 능한 이들이 적지 않았던 고로 그런 명당자리가 그대로 남겨져 있을 리가 없었으니, 일찍이 그곳에 자리한 것이 바로 마곡사이다.

무성산과 국사봉ㆍ금계산의 지맥이 합쳐져 이뤄놓은 그 명당에 자리 잡은 마곡사는 신라 선덕여왕 9년(640년)에 자장(慈藏) 율사에 의해 창건되어 향화(香火)를 피워 올린 이후, 사굴 산문의 개창자인 범일(梵一) 국사와 고려의 도선(道詵), 보조(普照) 국사 지눌(知訥), 조선시대의 각순(覺淳) 등에 의해 중창되었다.

마곡사는 천안의 태화산이 흐르다가 금계산과 국사봉으로 나뉜 후 그 흐름이 끝나는 곳에 이뤄진 터에 있으므로 산의 조종(祖宗)을 중시해 일반적으로 ‘태화산 마곡사’라고 불리지만, 무성산이 가까이에 있기 때문에 더러는 ‘무성산 마곡사’라고 부르는 사람이나 실제로 그렇게 불리던 때가 있기도 했다.

그때 인산은 마곡사의 절터를 두루 살펴보는 과정에서 그 절터에 못지않게 묏자리[陰宅]로 쓸 만한 명당이 몇 군데 남아 있는 것을 발견하고는, 그중 가장 눈에 띄는 곳을 연로하신 아버지의 신후지(身後地)로 써야겠다고 마음먹었었다. 그래서 아버지를 마곡사 근처에 가서 지내시도록 한 것이었다.

한편 인산은 마곡사 부근의 그 묏자리를 염두에 둔 이후의 어느 날, 역시 그 근처에서 살고 있는 박아무개라는 사람을 만나 극진한 술대접을 받은 일이 있었다. 그는 인산보다 네댓 살 가량 아래의 순박한 농촌 사람이었다. 그 먼 윗대 조상 때에 십승지지(十勝之地)를 찾아 그곳에 들어와 뿌리를 박은 이래 대대로 산비탈을 일구는 등 논밭 마지기를 마련하여 농사를 지어온 토박이기도 했다.

우리나라에는 예로부터 세 가지 재앙(三災)과 여덟 가지 환난(八難)이 범하지 못한다는 열 곳의 명당 지역이 전설로 전해져 온다. 충남 공주의 마곡이 그중에 속하는 곳이었던 것이다. 술잔이 몇 순배 돌고 피차 거나한 기분이 들었을 때, 박씨가 심중에 두었던 말을 꺼냈다.

“김 선생님, 알고 계시는지 모르겠지만 저는 나름대로 지가서(地家書)를 들여다보며 공부를 해왔습니다. 뭐 제가 그 방면으로 아예 나서려고 한 것은 아니고, 그저 관심이 끌린다고나 할까…… 그래서 그런 것인데……. 기왕이면 제가 사는 이 근처의 땅이라도 제대로 볼 줄 알았으면 좋겠다 싶은 마음은 가지고 있습니다.”

약간 겸연쩍어하는 표정으로 운을 뗀 박씨로서는 인산이 사람의 병을 고치는 데 뛰어난 능력을 지녔을 뿐만 아니라, 양택(陽宅)이나 음택 등을 가려 볼 줄 아는 지리에도 정통한 인물이란 것을 알고 있었다.

“김 선생님, 제가 보기에 우리 마을 뒷산은 저 북쪽에서부터 생기를 띠고 내려와 청룡ㆍ백호로 두 팔을 벌린 듯 좌우로 갈라진 형국을 이루고 있으니, 그것이 감싸고 있는 거기 어디쯤에는 틀림없이 쓸 만한 음택의 혈처가 있지 않겠습니까? 책에서 공부한 것을 실습할 겸 종종 둘러보기는 하는데, 원체 눈이 모자라서 정작 그런 자리를 알아볼 수가 있어야지요.”

박씨는 알고 싶은 것을 아직 모르는 사람으로서 인산이 한 수 가르쳐주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그렇게 말했다. 그의 눈빛이 그날따라 유난히 성실해 보였다. 정성을 다해 내온 술은 오랫동안 소중히 묵힌 듯, 누룩 냄새는 간데없고 향긋한 발효 향과 함께 노르께한 것이 마냥 투명하였다. 인산으로서는 마음을 풀어놓지 않을 이유가 없었다.

“하하, 이 사람…… 알고 보니 그런 구석이 또 있었구먼. 하지만 산안(山眼)이 트이려면 지가서 몇 권을 떼는 것만으로는 태부족이란 걸 알아야 하네. 물론 그런 책을 통하여 선인들의 경험에서 나온 원리 정도는 알 수 있겠지만, 땅의 생김새나 산천의 배열이란 게 어디 그렇게 두부모 자르듯이 반듯반듯하던가? 요는 책이나 선생을 통해 기본 원리를 배우고 나서 그것을 토대로 마음에 새로이 떠지는 눈으로 산을 볼 수 있어야 한다네. 하지만 그게 어디 쉬운 일이겠는가?”

인산은 하얀 사기 잔에 채워진 술을 단숨에 쭉 들이켜고는 하던 말을 이어갔다.
“아무튼 자네가 독학으로 터득한 지리만 하더라도 쓰임새는 있을 걸세. 들어보니 이 동네까지 닿아 있는 지맥의 흐름을 대충은 보고 있는 것 같으니 말일세. 그렇다네. 자네가 말한 대로 태화산에서 흘러온 맥을 금계산이 받아 다시 흐르다가 이룬 터가 마곡사 절터이고, 그것에 그친 것이 아니라 주변에 몇 군데 생기 있는 음택 터를 이뤄놓은 게 사실이네.”

인산이 거기까지 이야기했을 때 박씨는 문갑 위에 접힌 채로 올려져 있던 한지를 가져다가 인산의 무릎 앞 방바닥에 펼쳐놓았다. 마곡사를 중심으로 해서 북으로부터 내려온 산맥의 흐름과 하천 등을 그려놓은 그림이었다.

“섭섭하게 들릴지는 모르겠으나, 자네는 앞으로 더 이상 지리 공부에 빠져들지 않는 게 좋을 것일세. 행여 자네의 아이들에게도 그 공부를 시킬 생각을 하고 있다면, 내 말을 들은 이후로는 접어두게. 명당자리 찾아 모신다고 고이 계신 조상의 뼈를 파들고 헤매는 반풍수 집안에는 반드시 서리가 내리는 법이란 걸 명심하란 말일세. 아까도 말했지만 지가서에 일러둔 것 좀 훑어봤다고 해서 함부로 나서다가는, 명당은커녕 두엄자리만도 못한 데다 조상을 모셔놓게 되는 것일세. 중요한 건 산안이 열려야 하는 것인데…….”

박씨가 비워진 인산의 잔에 공손히 술을 따르며 말했다.
“여부가 있겠습니까? 김 선생님께서 일러주신 말씀을 꼭 명심토록 하겠습니다. 저 역시 알쏭달쏭하기만 한 지가서를 들고 평생 골머리를 썩일 생각은 없고, 단지 내 집안 산소 자리를 남에게 의지하지 않고 잡을 수 있는 정도만 될 수 있다면 족하다는 생각은 가지고 있습니다. 그렇다고 저희 집안에서 재상이 나오겠습니까, 장군이 나오겠습니까? 그저 태평 무사하게 큰 변고 없이 대를 이어갈 수 있게 된다면, 그게 바로 저희 집안의 발복(發福)이겠지요. 그러니 부디 선생님께서 한 수 가르쳐주십시오. 제가 뭐 산안을 뜨겠다고 헛된 욕심을 가진 것이 아니라, 말씀드린 정도의 이유로 그저 이 근처 땅거죽 속 어디에 어떤 기운이 들어 있는지 그것만 귀띔해 주시면 더 바랄 것도 없습니다.”

“허허, 자네도 어지간하구먼……. 괜히 되지도 않을 일에 마음 쓰고 애를 태우고 그러는구먼. 그냥 술이나 들지……. 내게서 한두 마디 듣는다고 자네의 닫힌 눈이 열린다면, 이 나라 방방곡곡은 도사(道士)들로 넘쳐나고 말 걸세. 허허, 참…….”

인산의 말을 듣는 박씨의 얼굴에 낙심하는 빛이 역력히 어렸다. 그러나 그는 포기하지 않고 인산의 곁 쪽으로 앉음새를 고쳐 다가앉으면서 물었다. 그의 손가락은 펼쳐놓은 지형 그림을 가리키고 있었다.

“그렇다면 이 그림상으로만이라도 한 말씀 해주십시오. 원리상 이 부근 어딘가에는 틀림없이 명당이라 할 만한 혈처가 있을 텐데, 그것이 있다면 어느 자리이겠습니까?”

꽤나 진지한 모습이었다. 인산은 그저 웃음밖에 안 나오는 가벼운 생각에서 대답을 하였다.

“보기는 제대로 보았네만, 이미 한발 늦었네.”
“한발 늦다니요? 그게 무슨 말씀이신지……?”
“그곳의 혈처는 내가 이미 점찍어놓았다는 말일세. 나의 엄친께서 연세 높으시고, 돌아가실 때가 머지않은 까닭에 내가 그곳에 엄친을 모시려고 이미 작정을 해두었단 말일세. 그러니 그곳의 혈처에 대해서는 더 이상 거론치 말고, 우리 그냥 술이나 들도록 하세.”

박씨는 천 길 낭떠러지 아래로 떨어지는 사람 같은 표정을 짓더니, 얼른 생각을 바꾸어 다시 물고 늘어졌다. 겉보기보다는 영악한 구석이 있었고, 한 번 물면 놓지 않겠다는 집요함이 대단한 박씨였다.

“아, 그랬군요. 역시…… 김 선생님의 안목이라면 그런 혈처를 그냥 스쳐보지 않으셨을 테니까……. 아, 저는 그런 줄도 모르고……. 잘하셨네요. 그렇다면 제게 더욱 편안한 마음으로 그 자리를 일러주실 수 있겠네요. 그저 공부하는 재미삼아서 들어보게 말씀이나 해주시지요.”
“하, 이 사람…… 정말 끈질기구먼. 아까 자네 자신이 좌청룡과 우백호를 일컫고도 모르겠나? 여길 잘 보게.”

마침내 인산은 자신이 아버지의 신후지로 점지해 두었던 혈처에 대해 손가락으로 금을 그어가며 말하기 시작했다.

“여기에 이렇게 내[川]가 흐르니 배산임수(背山臨水)를 충족했고, 여기 내를 건넌 곳에 봉긋한 봉우리가 있으니 이게 안산(案山)이 아니면 뭐겠나? 조산(祖山)의 향(向)을 가늠하여 보면, 여기 이 자리…… 이 자리가 바로 내가 마음에 둔 자리일세.”
인산의 손가락 끝이 그림 위의 한 점에 머물렀다. 그러고 나서 이야기는 다시 이어졌다.

“청룡과 백호가 실(實)할 뿐 아니라 앞쪽의 내가 이 입구에 와서부터 궁형(弓形)으로 곡류(曲流)하니 새어 나가는 기운이 없고, 안산이 사납지 않고 후덕하여 두루 조화로운 길지일세. 이 혈 자리에 뫼를 쓰되 자좌오향(子坐午向)으로 앉히고, 석 자가량 되는 깊이에 조상을 모시면 그 자리의 생기를 그대로 받을 수 있게 되는 것이지.”

취기가 도도해진 인산의 입술이 흡사 대춧빛 같았고, 그 눈에서는 줄곧 불길이 흘러나오는 것 같아 자신도 모르게 어깨를 움츠리곤 했던 박씨는 비로소 안면 가득히 웃음기를 머금고 인산에 잔에 술을 채웠다.

“선생님의 말씀은 언제 들어도 기가 막힙니다. 거기에 혈처가 있는 걸 모르고서 저는 그저 마냥…….”

언젠가 그랬던 일이 있었다.
임진(壬辰, 1952)년 윤오월(閏五月), 아내로부터 ‘아버님이 별세하셨다.’는 소식을 받고 인산은 부랴부랴 부산에서 공주로 향했다. 조선조 고종 9년(壬申, 1872)에 태어난 인산의 아버지 경삼 옹의 삶이 81세를 일기로 끝을 맺은 것이다. 고인은 일찍이 1910년에 순종 황제로부터 강원도 통천(通川) 군수를 제수(除授) 받았으나, 경술늑약(庚戌勒約)으로 조선이 불법 병탄(倂呑) 당함에 따라 부임하지 못했었다. 시(詩)와 서(書)에 능한 학자였을 뿐 아니라, 악(樂)-그중에서도 특히 거문고-에도 뛰어나 서도(西道)의 내로라하는 인물들은 물론 전국 8도에서 수많은 사람들이 찾아오고는 했던 고인은 3남 인산과 함께 월남하여 외로운 객지에서 쓸쓸한 말년을 지내다가 생애를 마감하였다.

운암리의 집에 도착한 인산은 즉시 장례 준비에 착수했다.
인산은 동네 사람들 가운데 산역(山役)에 나설 만한 사람들 대여섯 명을 대동하고 자신이 봐두었던 산소 자리로 갔다. 그러나 그 자리에는 쓴 지 얼마 되지 않은 듯 보이는 산소가 이미 자리 잡고 있었다. 낭패감이 드는 게 이만저만이 아니었다. 불현듯 수년 전에 그 혈자리에 대해 대화를 나누었던 박씨가 생각났다. ‘산소 자리는 형제간에도 가르쳐주지 않는 것’이라는 옛말을 떠올리면서, 그곳에서 가까운 곳에 살고 있는 박씨의 집을 찾아갔다. 보통 지관(地官)들은 백 번을 다녀간들 짚어낼 수 없는 혈처였기에, 그곳에다 산소를 쓴 사람은 박씨가 틀림없을 것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사실 그 주변에 사는 사람들은 인산이 연로한 가친의 사후(死後)에 모실 신후지를 생각하고 가족들을 그곳에 들어와 살게 하였다는 것을 대강은 짐작하고 있었다. 인산 스스로도 이따금 부산에서 올라와 그곳 사람들과 대화할 적에 그런 의도가 있음을 내비친 적도 많았다. 그런데 서로 믿는 처지에서 터놓고 그 혈처에 대해 이야기를 해주었던 자신의 믿음을 저버리고 그 산소 자리를 가로챘다고 생각하니, 박씨의 소행이 괘씸하기 짝이 없었다. 더구나 지금 당장 돌아가신 아버지의 장례를 지내야 하는 인산으로서는 새로운 산소 자리를 찾아봐야 한다는 생각으로 마음이 바빠지고 있었다.

마침 박씨는 집에 있다가 인산의 방문을 받고 황급히 뛰어나왔다. 상제(喪制)의 신분임을 감안하여 집 안에 발을 들여놓지는 않고, 문 밖에 선 채로 이야기를 나누게 되었다.

“어이구, 김 선생님……. 그렇지 않아도 문상을 가려던 참이었습니다. 창졸(倉卒)간에 상을 당하시어 얼마나 애통하십니까?”
박씨는 인산의 손을 잡으며 진심인 듯 깊은 조의를 표했다.
“그런데 자네는 어찌하여 내가 내 아버지의 신후지로 지목했던 곳에다 산소를 썼는가?”

인산의 힐문(詰問)은 나직하였으나 천금의 무게로 박씨의 머리통을 내리누르는 것 같았다.
“아, 벌써 그곳에 다녀오셨군요? 김 선생님, 정말 죽을죄를 졌습니다. 작년에 제 아버님이 갑자기 돌아가셨는데…… 전쟁 통에 세상도 어수선하고…… 미리 정해 두었던 자리도 없었고…….”
박씨는 어쩔 줄을 모르고 허둥대며 횡설수설하였다.

“이것 보게. 자네는 처음부터 내게서 그 자리를 알아내려고 했던 것은 아니었는가? 이미 자네가 그 자리에 산소를 썼으니 나로서도 어쩔 수 없는 터에, 무에 그리 변명이 어수선한가? 그 자리가 탐났으면 탐났다고 똑바로 얘기하면 될 것을…… 에잇, 못난 사람 같으니라고.”

발길을 돌리려는 인산의 옷소매를 박씨가 잡아끌었다.
“김 선생님, 용서하십시오. 명당자리에 눈이 뒤집혀 사람으로서 못할 짓을 한 게 사실입니다. 제 사정 다급한 것만 생각했지, 선생님께 사전에 양해라도 구했으면 좋았을 일을……. 선생님께서는 그 자리가 아니라도 다른 자리를 얼마든지 찾아내실 수 있으리라고 생각했습니다. ……산주(山主)에게도 사전에 사용 허락을 받지 않았기 때문에 처음에는 평토장(平土葬)으로 모셨다가 석 달 전에서야 봉분을 올렸습니다. 면목이 없지만, 용서해 주시고…… 혹 선생님과 가깝게 지내시는 산주를 만나 뵐 기회가 있으시면 얘기 좀 잘해 주십시오. 정말 잘못했습니다.”

인산은 황망하고 다급한 가운데 차분히 새로운 산소 자리를 알아볼 여가가 없어서, 후일에 이장(移葬)할 것을 염두에 두고 본래 보아두었던 자리 근처에 아버지의 유해를 안장하였다.

인산은 18세 때 조부 면섭 공을 사별한 이후 이제 부친마저 돌아가시자 새삼 인생의 허망함을 뼈저리게 느꼈다. 살아 있는 동안에는 끊임없이 무엇인가를 보고, 느끼고, 생각하고, 계획하고, 이루려고 노력하며, 그러는 가운데 기뻐하고 실망하며 즐거워하고 슬퍼하기를 반복하지만, 막상 숨이 끊어지고 흙으로 돌아가면 그 무든 게 무상하기만 한 것이 인생이었다.

흙을 덮고 봉분을 쌓아올림으로써 무덤은 형체를 갖추었지만, 거기에 더 이상 자신의 부친은 존재하지 않았다. 이제 선친(先親)의 삶은 하나의 전설로 살아 있는 사람들의 기억 속에 남아 있을 뿐 형체 없는 세계로 소멸되고 말았다. 인산은 애통한 마음을 진정시키고 스스로의 삶을 들여다보았다.

만고에 다시없을 지혜를 가지고 이 세상에 와서 그것을 알아주는 사람 없음으로 인하여 늘 외롭고 불행하게 점철되어진 자신의 인생은 이후로도 크게 달라질 것이 없었다. 우주 영겁(永劫)의 시간에 비하자면 한 순간에도 못 미칠 인생을 입고 이 세상에 와서 애면글면 살아가는 자신의 모습은 한 치도 벗어남이 없는 인간의 모습이었다.

‘그래, 나 역시 인간 중생의 일원으로서 생로병사ㆍ희로애락의 굴레를 벗어날 길은 없다. 하지만 나에게는 해야 할 일이 있다. 내 짧은 생애를 통하여 내가 이루어놓은 모든 결과를 다 볼 수는 없겠지만, 적어도 내가 죽고 난 이후 백년 안에는 누구라도 스스로의 질병을 고칠 수 있는 시대가 올 것이다. 그 시대를 위하여 신의학(神醫學)의 비밀을 모두 밝혀놓는 일이 바로 내가 할 일이다.’

인산은 아버지의 장례를 치른 후 부산으로 돌아갔다가 그해 초가을에 아내가 장남을 출산하였다는 소식을 접하고 세춘한의원을 정리한 뒤 공주 운암리 참나무골의 집으로 들어갔다.

출처: http://kor.theasian.asia/archives/3207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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