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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산 김일훈 42] “일제의 수탈정책 아래 간신히 명맥을 유지하고 있었다”

작성자
인산한의원
작성일
2023-11-06 17:10
조회
322
그 후 계미(癸未, 1943)년 여름의 어느 날, 운룡은 산에서 내려와 충재 김두운 선생 댁에 며칠 묵으면서 지내다가 떠나게 되었다. 이때 선생이 언제 돌아오냐며 속히 들러주기를 바라면서 긴히 할 이야기가 있는 듯 하였다. 운룡은 영덕사로 가는 길에 장씨 댁에 잠깐 들렀다. 여느 때와 마찬가지로 장영봉의 부친을 비롯한 온 가족이 반색을 하며 모두 운룡에게 며칠 묵어가기를 청했으나, 운룡은 속히 일을 보고 충재 선생에게 돌아가리라 마음 먹었기 때문에 그 이튿날 길을 떠나야 한다고 말했다.

그러나 세상일이라는 게 사람의 뜻하는 대로만 할 수 없는 경우가 다반사인지라, 운룡이 장씨 댁에 도착한 다음 날 엄청난 비가 퍼부어 도저히 길을 나설 수가 없는 형편이었다. 기세가 녹록치 않은 장마에 내[川]마다 넘치고 곳곳의 길이 무너져 끊어졌을 것임이 뻔한 상황이었다. 그렇게 발이 묶여 장씨 댁에 머문 지 사흘째 되는 날 저녁에 장영봉의 부친(장 노인)은 다른 식구들은 모두 물러가게 한 후에 운룡과 마주 앉았다.

“자네 혼기가 한참 늦었는데 좋은 혼처가 있으면 어쩔텐가?”

갑작스런 질문에 운룡이 그저 무심히 답하였다.

“글쎄요……. 아직은 나라의 독립에 몸 담고 있는 처지라 혼인할 형편이 못 되고 게다가 부모 승낙도 못 받았으니 갈 수 없습니다.”

그러자 부모 승낙 없어 안된다는 운룡의 말에 얼른 꼬투리를 잡고 “자네 춘부장(운룡의 부친 김경삼) 승낙은 이미 얼마전에 서신으로 좋은 혼처가 있으니 허락해 달라고 받아놓았다네. 그리고서 자넬 기다리던 중이네. 자네 부모님만 승낙하시면 혼인할 텐가?”

운룡은 그때까지도 무심히 “부모님이 좋으시다면야 그러지요”라고 대답하였다. 그러자 장영봉의 부친이 서둘러 “그렇다면 약혼이라도 해두게.”라고 하지 않는가. 운룡은 그 말을 듣고 적이 놀라서 황급하게 거절하였다. “저는 지금 혼인할 생각이 전혀 없습니다. 혹 어르신 따님이라면야 모르겠지만.”

운룡은 장영옥을 여인으로 한번도 마음에 둔 적이 없어 장씨 딸의 존재를 생각도 못한 채 무심결에 거절하는 조건으로 말했다가 말을 내뱉는 순간 아차 하였다. 장노인은 ‘혼인할 생각이 없다’는 운룡의 말에 일순 시무록해졌다가 ‘어르신 딸’이란 말에 귀가 번쩍 뜨이듯 순식간에 얼굴이 활짝 펴지며 무릎을 탁 치는 것 아닌가?

“됐네. 자네와 나는 이제 장인 사위가 된 걸세. 여보, 영옥아. 어서 이리 들어오너라.”

장 노인은 기쁨에 겨워 목청껏 바깥을 향해 소리쳤다. 밖에서 간절한 마음으로 숨 죽여 기다리던 모친은 평소에 그토록 갈망하던 보물을 드디어 차지하게 된 사람 심정이 되어 앳된 소녀 영옥의 손을 재촉해 방으로 들어왔다. 아버지가 시키는 대로 한 옆에 다소곳 앉은 14세 어린 소녀 영옥은 희다 못해 파리해 보이는 청초한 얼굴에 갸날프기 그지 없었다. 상반신 체구가 당당한 35세 운룡에 비해 더욱 어리고 가녈어 보였다. 곧이어 주안상이 들어오자 장 노인은 운룡의 앞에 놓인 잔을 먼저 채우고 자신의 잔에도 술을 따랐다.

“여기 이 아이가 내 여식 영옥(永玉)일세. 경오(庚午, 1930년) 생으로 올해 열네 살 어린 나이니 내 특별히 자네에게 부탁하네. 오늘 약혼이 성립되었으니 더없이 기쁜 날이라 마음껏 마셔보세나.”

이미 장씨 가족이 미리 다 마련해 놓은 각본대로 착착 번갯불에 콩 튀겨먹듯 이루어진 약혼이라 운룡은 너무도 갑작스럽게 진행되는 상황 앞에 무어라 토 달 형편이 못 되었다. 장노인이 주는 잔을 덥썩 받아 단숨에 들이키고 고개를 돌려 소녀의 얼굴을 처음으로 제대로 바라보았다. 아뿔사, 소녀의 백옥처럼 흰 얼굴은 이 세상에서 장수할 상이 아니었다.

소녀의 짧아 보이는 명운이 운룡의 가슴 한쪽에 그늘을 드리웠다. 운룡은 복잡하게 얽혀드는 감회 속에서 장 노인과 동시에 술잔을 들어 단숨에 들이마셨다. 목젖에 찌르르한 자극을 남기며 넘어가는 술맛이 그날따라 유별나게 독한 것 같았다. 그러나 장씨 가족은 이를 조금도 눈치 채지 못한 채 그저 온 가족이 기쁨에 겨워할 뿐이었다. 장영봉은 세상에 다시 없을 귀인인 운룡과 인척으로 맺어진 사실에 기뻐 어쩔 줄 몰랐고 장노인과 그 부인도 더없이 기뻐하였다.

기쁨에 겨운 온 가족이나 여전히 부끄러움 때문에 고개를 못 들고 있는 영옥 그녀 자신이 알지 못하는 앞날의 운명을 운룡은 내다보고 있었다.

‘저 사람이 내 아내가 되어 20년을 채 살지 못하고 이 세상을 뜨게 될 것이니…… 이를 어쩐단 말인가? 내가 저 소녀의 지아비 되는 일 또한 이미 정해져 피할 도리가 없는 일이었던가.’

혼약의 밤, 기뻐하는 장씨 집안의 사람들과 먼 미래에 맞게 될 비극을 뻔히 알면서도 하릴없이 자기의 운명과 하나가 되는 것을 받아들인 운룡의 가슴속에 제각각 다른 음색으로 반향(反響)되는 그 밤의 빗소리는 새벽까지 이어졌다. 3일간 운룡의 발을 장씨 집에 묶어 놓았던 억수같이 퍼붓던 비가 약혼이 이뤄진 다음 날 아침 거짓말처럼 개었다.

그로부터 두어 달이 지난 무렵 1943년 9월 운룡이 약산의 충재 김두운 선생 댁을 방문하였을 때, 충재 선생은 기다렸다는 듯이 반가이 맞이하였으나 기색은 전에 없이 사뭇 어두웠다.

“선생님, 안색이 안 좋으신데 무슨 일이라도……?”

운룡은 충재 선생의 안색에서 불길한 시련이 닥칠 것이란 것을 읽을 수 있었다.

“나는 이제 곧 왜경에 잡혀갈 것이오. 자네는 평범한 인물이 아니니 쉽사리 잡힐 것 같지 않으니 앞으로도 계속 나라의 광복을 위해 분투해주리라 기대하네.”

충재 선생은 갑자기 표정을 달리 하더니, 긴 시간 동안 묵혀 두었던 듯한 말을 꺼내었다.

“그동안 대해 오는 가운데 나는 자네가 범상한 인물이 아님을 익히 알고 있었소. 누구에게 특별히 배우거나 듣지 않고서도 세상의 이치와 학문의 근간(根幹)을 꿰고 있는 점에서도 그렇고, 무엇보다도 천지 만물의 교행(交行) 원리를 아는 사람만이 행할 수 있는 신술(神術)로써 숨이 끊어진 사람도 살려내는 의술은 자네가 어떤 인물이라는 것을 단적으로 보여주는 것이라고 생각해 왔소. 비록 나보다 어린 사람이기는 하나 내가 늘 마음 한편으로 자네를 우러를 수밖에 없었음도 그런 이유 때문이오. 이제 내가 청하건대 미거(未擧)하지만 내게는 어여쁘기 둘도 없는 내 여식을 자네가 아내로서 맞아주기를 바라오. 지금은 제반 사정이 여의치 못하니 우선에는 약혼만이라도 하고, 후일을 기약해 주었으면 고맙겠소. 자네가 내 청을 들어준다면, 내가 당장 어떤 질곡(桎梏)을 지게 된다 하더라도 홀가분한 마음으로 임할 수 있게 될 것이오.”

운룡은 그 순간 당황하지 않을 수 없었다. 한 사람의 인간으로서 타인을 대함에 있어서 충재 선생만큼 운룡의 마음에 존경의 염을 갖게 한 이가 드물었던 게 사실이었다. 그런데 그런 분이 자신에게 ‘우러름’을 느꼈다는 대목에서도 그랬거니와, 그 따님과 혼인을 하게 하여 자신을 사위로 삼으려 한다는 것과 자신은 이미 약혼을 한 몸이라는 사실이 한꺼번에 작용하였던 것이다. 운룡은 공손하게 응답하였다.

“선생님 말씀에 저는 몸 둘 바를 모르겠습니다. 다만 제가 선생님의 청을 받자와 할 수 없는 까닭을 말씀드리자면, 제게는 이미 두어 달 전에 혼인할 것을 약조한 사람이 있기 때문입니다.”

“허허, 그러고 보니 큰일을 도모한답시고 가정사에서는 한 발 늦은 셈이로구먼…….”

충재 선생은 말할 수 없이 아쉽다는 표정으로 혀를 차더니, 문갑 속에서 봉투 하나를 꺼내 운룡에게 내밀었다.

“금일 아침에 자네에게 주려고 적어놓은 것이오.”

운룡은 봉투를 받아 그 안에 든 서한(書翰)을 펼쳐보았다.

‘書贈

金君 雲龍

雲龍卓然有學問之志 再訪余藥山之陰 余蓋叩其所存 察其所以 而許之以歲寒之約矣 特因事撓未遑鎭日講論 而先焉以省齋柳先生 告同講諸子文曉燈講授 嗚呼雲龍 勉乎哉 文之言 獄中尙書舟中大學 儘今日形便也 君須還山 熟講此文 領略大義然後 乘吾撓霽 復訪講其未講 不亦善耶 於其別 悵無以酬遠來之勤 聊書以贐

癸未 重陽日 桂雲山人 金斗運 復汝’

그 뜻을 새기자면 대략 다음과 같다.

김운룡 군에게 글로써 적어 주노라.

운룡은 학문을 향한 뜻을 지닌 뛰어난 사람으로서 약산 고을에 사는 나를 여러 차례 찾아왔으며, 나는 그가 어떤 사람인지 타진해 보고 그의 언행을 살펴본 끝에 세한(歲寒)의 약속을 허락하였노라. 하지만 최근에 여러 가지 일들에 쫓겨 차분히 시간을 갖고 강론할 겨를이 없었기에 우선 성재(省齋) 유중교(柳重敎) 선생께서 ‘함께 공부하는 사람들에게 전하는 글’을 가지고 새벽 등잔불 아래에서 강수(講授)를 하였도다. 오, 운룡이여, 열심을 낼지어다. 그 글 가운데 감옥 안에서 《상서(尙書》(書經을 말함)를 읽고 배 위에서도 《대학(大學)》을 익혔다는 선인(先人)들의 비장했던 상황은 바로 오늘날 우리들이 처해 있는 상황과 다를 바가 없도다. 그대는 산으로 돌아가 성재 선생의 그 글을 열심히 공부하여 대강의 뜻을 파악한 후에, 내가 다시 비 개인 날을 맞아 편안히 강론할 수 있을 때 다시 찾아와 미처 다하지 못한 공부를 마저 할 수 있다면 그 또한 좋은 일이 아니겠는가? 멀리서 찾아온 노고에 달리 보답할 것은 없고, 오직 여기에 몇 자 적어서 전별(餞別)의 뜻으로 삼고자 하노라.

계미년 중양일(음력 9월 9일) 계운산인 김두운 복여.

이 글 중에 ‘세한(歲寒)의 약속’이라는 말은 《논어(論語)》 가운데 ‘매우 심한 한겨울의 추위를 겪고 난 후에야 송백(松柏)이 끝까지 푸르다는 것을 알게 된다(歲寒然後知松柏之後凋).’는 구절을 인용한 말로써 나라의 광복을 위해 끝까지 절개를 지키자는 독립운동가들의 서약으로서 쓰인 말이다.

또 ‘감옥 안에서 《상서》를 읽었다.’는 것은 한(漢)의 선제(宣帝) 때 하후승(夏侯勝)과 황패(黃覇)가 역모 죄로 함께 감옥에 갇히게 되었을 때 황패가 하후승에게 요청함에 따라 하후승이 《상서》를 가르친 일을 가리킨다. ‘옥중에 있는 사람이 글을 배워서 뭣 하느냐?’는 하후승의 질문에 황패는 ‘아침에 도를 듣고 깨닫는다면 저녁에 죽어도 좋을 것(朝聞道 夕死可矣)’이라는 공자의 말(《논어》 <里仁>편)을 인용하여 대답하였고, 이를 가상히 여긴 하후승은 황패에게 《서경》을 가르쳤던 것이다.

그리고 ‘배 위에서도 《대학》을 익혔다.’는 것은 송(宋)나라 말엽, 당대에 손꼽히는 대학자 육수부(陸秀夫)가 배로 나이 어린 마지막 황제 제병(帝昺, 본래 이름은 趙昺)을 모시고 피난을 다닐 때, ‘《대학》은 제왕의 학문이므로 배우는 데 있어서 때와 장소를 가릴 수가 없다.’고 하며 배 위에서조차 《대학》에 대한 시강(侍講)을 게을리 하지 않았다는 고사(故事)를 일컫는다.

‘복여(復汝)’는 충재 선생의 자(字)이다.

운룡은 충재 선생이 준 서한을 가슴 깊이 간직하고 그 댁을 떠나 다시 묘향산으로 들어갔다. 총독부 습격사건 계획이 1943년 일본경찰의 예비검속에 의해 주동 인물이 모두 체포됨에 따라 또다시 묘향산으로 도피해 들어가 설령암, 강선암에 은거하게 된 것이다. 이 때 충재 김두운 선생이 잡혀가기 직전 운룡을 만났던 것이다.

김두운, 문창수 형제와 김형로, 최니학(최용건의 부)은 주동 인물로 검거되어 사형이 확정되었다. 충재 김두운과 김형로는 1945년 8월 17일에 사형을 집행할 예정이었으나 8월 15일 조국광복을 맞아 석방되었다. 중일전쟁과 태평양전쟁을 일으킨 일제의 광란이 서서히 그 끝을 보이고 있는 때였지만, 우리 민족은 더욱 악랄해진 그들의 수탈 정책 아래 간신이 명맥을 유지하고 있었다.

출처: http://kor.theasian.asia/archives/3132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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