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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산 김일훈⑤] 1909년 탄생···기유(己酉)·기사(己巳)·갑술(甲戌)·을해(乙亥)

작성자
인산한의원
작성일
2023-11-06 15:58
조회
204
조선 순종(純宗) 융희(隆熙) 3년(1909, 己酉) 3월 25일(음력, 己巳) 밤(亥時)이었다. 함경도 홍원군(洪原郡) 용운면(龍雲面) 연흥리(連興里)의 향교(鄕校) 전교(典校) 김면섭(金冕燮)의 집 건넌방에서 우렁찬 신생아의 첫 울음이 터져 나왔다. 미시(未時) 무렵부터 산모 유씨(劉氏)의 몸에 산기(産氣)가 돌기 시작해 온 집안 식구들이 저녁 식사도 하는 둥 마는 둥 하며 출산의 때를 기다려 왔는데, 마침내 새 생명의 탄생을 알리는 소리가 호롱불 빛을 받아 붉게 물든 창호지를 뚫고 흘러나온 것이다. 이어서 신생아를 씻길 물을 떠가지고 들어갔던 이웃 아낙네가 입을 함박만 하게 벌리며 나와서 산방(産房)의 첫 소식을 전했다.

“전교 어르신, 경하(慶賀) 드립니다. 새 손자를 보셨습니다.”

뒷짐을 진 채 안마당에서 서성거리던 김면섭은 괜한 헛기침을 두어 번 허공에 날리다가 고개를 젖혀 밤하늘을 올려다보았다. 칠흑 같은 밤하늘의 속살에는 한 뼘의 빈 공간도 남기지 않고 가득 박혀 있는 별빛이 그날따라 찬란하였다.

‘음, 수기(水氣)를 관장하는 별무리 중에서 으뜸별이라……. 경사는 경사로되 삼갈 일 또한 많겠구나.’

김면섭은 내심의 기쁜 빛일랑 그 밤의 어둠 속에 감춰두고, 새로 태어난 손자의 앞날에 그 아기가 타고난 대로의 무한한 성취가 있기만을 축원하였다.

김만득은 운룡의 생후 세이레가 지난 그 이튿날에 김면섭의 집을 다시 찾았다.

‘기유(己酉) 기사(己巳) 갑술(甲戌) 을해(乙亥).’

김만득이 행장(行裝)을 풀더니 꺼내어 펼쳐든 화선지에는 놀랍게도 운룡의 사주(四柱)가 여실히 적혀 있었다.

“성재 선생께서는 제 손자의 생일ㆍ생시까지 정확하게 예견하고 계셨군요!”

김면섭은 자못 놀라움을 감추지 못하고 말했다.

“소생이 말씀드리지 않았습니까? 이 아이는 수성계의 으뜸별의 운행에 따라 이 세상에 온 것이라고. 천계(天界)의 별들이 운행함에 있어서는 터럭만큼의 오차도 있을 수 없는 법이고, 소생은 단지 어두운 눈으로 그것을 조금 일찍 보았을 따름입니다. 아무튼 아기가 건강하다니 소생의 마음 기쁘기 한량없습니다. 괜찮으시다면 소생에게 아기를 친견(親見)할 수 있는 영광을 허락해 주십시오. 왠지 제 마음이 허둥거려지는 것이…… 소청(所請)을 더는 미룰 수가 없습니다.”

김만득은 한시라도 빨리 운룡 아기를 보기 원했다.

강보에 싸인 채 어미의 품에 안겨 들어오는 운룡 아기를 김만득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맞았다. 김면섭을 통해 전해 받은 운룡 아기를 두 팔로 받쳐 든 김만득은 자신도 모르게 부르르 몸을 떨었다. 한눈에 아기의 넒은 이마에 뚜렷이 드러나 있는 천계의 성운(星雲)을 보았기 때문이었다. 그것은 그가 예상했던 대로 북방의 수성계를 관장하는 별무리의 양태를 그대로 옮겨다 놓은 것 같았다.

아기의 초롱초롱한 눈망울은 무엇인가 그에게 얘기를 건네려는 것 같은 빛을 담고 있었고, 신생아답지 않게 오뚝한 콧날과 한일자로 굳게 다물린 입술은 아직은 말할 수 없는 우주의 감추어진 원리들을 그 안에 간직하고 있음을 암시하는 듯했다. 김만득은 자신의 육안으로는 볼 수 없지만, 화엄신장(華嚴神將)을 비롯한 제 신장들이 운룡 아기의 주위를 엄중히 둘러싸 지키고 있음을 충분히 감지할 수 있었다.

‘한량없이 큰 뜻으로 오신 이여, 바라옵건대 날빛보다 밝은 지혜로써 온 세상을 비추소서. 고통 속에서 신음하는 만백성을 구원하소서!’

김만득은 운룡 아기의 눈을 들여다보며 마음속으로 간절한 축원을 바쳤다. 천문과 지리에 내재한 오묘한 진리에 눈뜨기 위해 닦아온 수행의 세월 속에 점철되었던 온갖 기억들이 주마등처럼 그의 뇌리를 스쳐갔다. 평생을 일관하여 한 가지 이치라도 더 깨닫기 위해 가르침을 줄 만한 스승이 있다면 원근(遠近)을 마다하지 않고 찾아가 그 문하(門下)에 머리를 조아렸고, 삼천리 방방곡곡에 잠재(潛在)한 지룡(地龍)의 자취를 더듬느라 얼마가 될는지 헤아릴 수 없는 노정(路程)을 헤매며 다녔다.

제 아무리 사납고 모진 비바람과 추위, 굶주림을 겪더라도 하늘의 이치에 한 발짝이라도 더 다가서기 위해서는 고산(高山) 준봉(峻峰)을 가리지 않고 올라갔었고, 인간의 삶과 죽음의 터전인 땅에 감춰진 비밀을 캐내기 위해서 세세(歲歲) 연년(年年) 팔도의 산야에서 정열을 불태웠었다. 그리하여 마침내 그 모든 수행의 정점에서 운룡 아기의 점지를 짚어낼 수 있었고, 자신의 눈으로 그 현현(顯現)을 확인할 수 있게 된 것이다.

비록 운룡 아기가 자라나 하늘로부터 부여받은 광대한 뜻을 펼쳐나가는 모습을 직접 볼 수는 없겠지만, 보지 않아도 본 것처럼 환하게 전개되는 심상(心相)이 있었기에 김만득으로서는 자기 생애에 이룰 바를 다 이루었다는 생각이 들었다. 언제 죽어도 여한이 없을 듯싶었다.

운룡 아기가 처소로 돌아간 후에 김만득은 홀로 연흥리 뒷산 계곡으로 들어가 청량(淸凉)한 계류에 몸을 담가 목욕재계(沐浴齋戒)하고, 너럭바위 위에 좌정하여 서너 식경 참선에 든 끝에 운룡 아기의 집으로 되돌아왔다. 온몸과 마음의 공력(功力)을 집중한 탓에 그의 얼굴은 몇 시간 만에 수척해졌으나, 눈빛만은 그 어느 때보다도 형형하였다. 그는 김면섭이 지켜보는 가운데 먹을 갈아 심상에 맺힌 운룡 아기의 평생에 대해 써 내려가기 시작했다. 4언(言) 1백 구(句)에 이르는 긴 시(詩)였다.”

출처: http://kor.theasian.asia/archives/3109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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