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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산 칼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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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산 김일훈 71] “지리산 초막은 지구촌 최고의 암센터였다”
작성자
인산한의원
작성일
2023-11-07 12:55
조회
1395
<신약>의 출간 이후 난치병으로 꼼짝없이 죽을 날만 기다리던 전국의 암환자들이 지리산 도사를 찾아 함양으로 몰려들어와 인산은 평생 그러하듯이 무료 처방을 써주었고 말기암으로 병원에서 포기한 환자들은 처방전을 받아들면 함양읍내에 있는 건재약방으로 달려갔다.
당뇨, 고혈압, 간암, 폐암, 신장암, 위암, 뇌종양, 백혈병, 황달을 비롯하여 에이즈, 골수암, 베체트, 근위축증, 흑색암, 섬유종, 루게릭, 별별 듣도 보도 못한 희귀난치병에 대한 온갖 처방이 인산의 입에서 술술 흘러나왔다. 아시아 동쪽 반도 끝에 있는 한국의 동남쪽 궁벽한 지리산 산골마을 함양, 다 쓰러져가는 초막에서 최첨단 의료선진을 자랑하는 미국도 못 고치는 현대 희귀난치병 환자의 각종 처방이 매일매일 쏟아져 나오고 있었다.
인산의 좁은 마당 한켠에선 최신식 암신약개발이 이루어지고 있었다. 최고의 천연항암제 청색담반이 가스를 내뿜으며 숯불에 타고 있었는데 인산이 발명한 암신약 중에 가장 강력한 암세포 살해효능을 자랑하는 천연항암제였다. 국립암센터, 삼성의료원, 서울아산병원이 설립되기 훨씬 이전의 일이다. 지리산 인산의 초막은 이미 지구촌 최고의 암센터였던 것이다.
인산을 찾아오는 사람이 많아짐에 따라 그의 노년기는 피곤함과 시달림으로 점철될 수밖에 없었다. 잠도 제대로 잘 수 없는 나날들이 이어졌다. 하루 종일 환자들을 대하는 것도 모자라 자정을 넘긴 새벽 시간에도 대문을 두드리는 절박한 환자가 끊이질 않았다. 또 찾아오는 사람들이 많다 보니, 그중에는 별 사람이 다 있었다. 물론 여러 병·의원을 전전했으면서도 살 수 있다는 가망성을 찾지 못한 그들의 상한 마음을 생각하면 이해하지 못할 일도 아니었으나, 예의와 염치를 모르는 몰상식한 사람들이 종종 있었다.
“이게 무슨 처방이오? 유황오리를 삶아 먹으라니, 이것도 약이란 말이오?”
“영감님이 책임질 수 있어요? 만일 한 달 안에 제 병이 낫지 않으면 어떻게 하시겠어요?”
“차비와 시간을 들여서 여기까지 왔는데, 하고 사는 집 꼬락서니를 보니, 얘야, 아무래도 헛걸음을 한 것 같구나. 그냥 돌아가자.”
인산은 그런 사람들을 볼 때마다 가슴을 쳤다. 평생토록 그의 가슴에 엉겨 붙은 응어리가 꿈틀꿈틀 치밀어 올라 불같이 역정을 내기도 했다.
“천하에 미개한 종자 같으니라고. 머리에 똥만 든 버러지보다 못한 놈이로구나. 썩 내 눈 앞에서 사라지거라.”
당시 인산의 부인은 살림을 꾸려나가기 위해 인산이 발명한 유황 등 약재를 섞어 먹인 유황오리를 사육하였다. 그리고 그것이 필요한 환자들에게 한 마리 당 1만~1만 5천원씩에 팔았다. 사육하는 데 들어간 금액을 감안해서 책정한 가격이었다. 그런데 일부 사람들은 그것을 또 걸고 넘어졌다.
“도사가 돈 맛을 알더니 오리 장사를 하면서 폭리를 취하는구먼.”
역시 약재로 쓰기 위해 집 대문 앞에서 키우는 염소들을 보고 비아냥거리는 사람도 있었다.
“도사가 몸보신을 하려나, 웬 염소를 키운담?”
어차피 그런 무지한 이들은 유명한 지리산 도사라니까 그저 한번 들러나 본 것이고 인산이 써주는 작은 처방 쪽지가 그들을 염라대왕 앞에서 빼내줄 유일한 천금같이 귀중한 티켓이라는 걸 알리도 없었다. 그러나 대부분은 절실히 도움이 필요한 가련한 환자들이었다. 병원을 전전하다 사형선고를 받은 환자나 보호자들은 살길이 있을까 하는 마지막 희망에 손바닥만한 어두컴컴한 방안에 서로 서로 어께를 맞대고 쪼그리고 앉아서 그들의 앞에 가부좌를 틀고 앉아 있는 긴 흰 수염, 부처님같이 축 늘어진 귓불을 지닌 도사 풍모의 인산을 간절한 눈빛으로 쳐다보고 있었다.
인산은 자신의 피곤함도 잊고 자신이 지니고 있는 우주와 신약의 비밀을 이 세상에 한 조각이라도 더 내놓고 가려는 듯 알아듣든 못 알아듣든 아랑곳하지 않고 평범한 보호자들을 앞에 놓고 석학들에게 강연하듯 우주의 법칙과 신약의 비밀을 설파하곤 했다. 인산의 전문 의학강연은 그렇게 상담 도중에 녹취한 녹음으로 일부나마 남게 되었다. 다 죽는다고 했지만 인산의 처방으로 기적처럼 살아난 말기암 환자들의 입과 입을 통해 지리산 도사 인산의 명성은 날로 높아져 매일 함양읍내는 낯선 타지인으로 붐볐다.
자식들이 들러도 부자간에 제대로 편히 대화를 나눌 짬도 없었던 게 그 즈음의 형편이었다.
좁은 방안에서 하루종일 온갖 환자들이 북적거리는 광경에 자식들이 걱정스러워 한마디씩 하면 “피곤해도 어쩌겠냐? 내 도움을 바라고 찾아오는 사람들인데…….”
라며 평생을 그랬듯이 무료진료를 계속하였다.
수만 명의 환자를 치료한 인산은 기력이 많이 쇠약해져 가능한 한 공개 강연회에 나가 강연을 하는 범위에서 활동을 제한하고 싶었지만, 방문해 오는 난치병 환자들이 끊이질 않아 현실은 뜻과 같지 않았다.
그 사이(1987년)에 인산을 종신 회장으로 추대한 ‘민속신약연구회’가 발기인 2백여명이 동참한 가운데 서울 프레스센터 19층에서 창립되었다(동 연구회는 1990년 3월 ‘건강문제 연구 시민모임’으로 명칭을 바꿨음). 그리고 1989년 7월에는 인산의 의술을 연구하려는 사람들의 강렬한 요청에 따라 인산의 독특한 의방(醫方)을 연구·실천·보급하는 한편 동서 의학의 상호 수용을 통한 발전 방향을 모색하기 위한 목적으로 월간 잡지 <민의약>(民醫藥)이 창간되었고, 인산은 그 잡지사의 회장으로 추대되어 취임하기도 했다(<민의약>은 1990년 4·5월호부터 <건강저널>로 제호가 변경되었음).
그 당시의 세상에는 죽염이라는 것이 없었다. 인산이 처음 죽염을 발명하여 개인적으로 만들어 환자에게 써온 것이니 제도적으로도 죽염의 제조·판매에 관한 규정이 있을 리 없었다. 제조허가를 받기 위해 인산의 아들이 1년여 동안 관계기관에 질의를 하거나 법조문을 연구한 끝에 함양 군청에 염제조 허가 신청을 했다. 그리하여 1987년 겨울 세계 식품제조업 역사상 처음으로 죽염을 등록하고 생산하여 시판하게 되었다.
1917년 인산이 아홉 살 때 세계 최초로 죽염을 발명한 이래 함남 홍원에서 처음 죽염을 굽던 날로부터 전국을 떠돌며 여러 차례 죽염을 만들어냈지만 정식으로 허가받고 상표를 붙여 제조하기는 70년만의 일이었다. 인산이 발명한 죽염이 인체에 상상을 뛰어넘는 효과를 발휘하고, 난치병을 치료하는 데 없어서는 안 될 귀중한 약이 된다는 사실은 무수한 사례로써 실증된 터였다.
따라서 죽염의 효능과 가치가 일반인들에게 알려지는 데는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인산의 차남이 시작한 죽염 사업이 활기를 띠기 시작하자, 곧 여기저기서 죽염 제조업체들이 우후죽순처럼 생겨났다. 누군가의 사업이 잘된다 하면 곧바로 따라서 하는 사람들이 생겨나기 마련이었다.
그 때 인산의 저서 <신약>을 출판해준 밀알출판사 이경용 사장(향봉스님 동생)은 <신약>이 뜻밖에 베스트셀러가 되어 민간에 반향을 불러일으키자 인산의 죽염에 관심을 갖고 함께 죽염사업을 하자고 제의했는데 인산의 차남은 동업을 반대하고 독자적인 죽염사업을 추진했다.
인산은 차남이 직접 죽염사업에 뛰어드는 것을 못마땅하게 여기고 타인인 밀알출판사에 맡기기를 바랐지만 가난에서 한번 벗어나 세상에 출사하고자 하는 아들의 솟아오르는 의지를 꺾기에는 역부족이었다. 인산의 아들이 천신만고 끝에 죽염제조허가를 받아 사업체를 차리자 몇 년 후 밀알출판사 이경용 사장 측은 할 수 없이 독자적으로 개암죽염을 창업하고 스토리텔링을 위해 죽염의 역사를 날조해 승가의 비전이라는 선전에 열을 올렸다. 이경용 사장 측이 불교계의 인맥을 활용하고 특유의 영업마인드로 전국 사찰을 중심으로 죽염을 홍보해나가자 죽염은 불교신자들 속에서 빠르게 확산되기 시작했고 한동안 신문과 잡지, TV에 죽염에 대한 기사가 빈번하게 등장하였다.
죽염이 갑자기 대중에게 선풍적인 인기를 끌자 대기업인 LG에서 발 빠르게 잇몸염증에 탁월한 죽염의 효능을 강조하며 죽염치약을 특허등록하고 식약청 허가를 내어 시장에 내놓았다. 바로 그 전에 LG측 인사가 당시 회사대표를 맡고 있던 차남(윤세)에게 찾아와 치약에 들어가는 죽염을 싼값에 납품해줄 수 있느냐고 문의해왔다. 당시 죽염은 인산의 발명원칙에 의해 아홉 번 고열로 구워내는 진정한 죽염만 생산하던 터라 죽염을 아홉 번 구워 완성하려면 약 50일이 소요되어 원가조차 상당히 고가였고 죽염이 날개 돋힌 듯 잘 팔렸기 때문에 차남은 값싼 원료판매를 거절하였다.
사업상 단가에 맞춰 정품 9회죽염 대신 한번 구운 값싼 죽염을 생산하여 납품하였더라면 장기적인 관점에서는 대기업에 의한 선전효과가 컸겠지만 당시 차남이 거절했고 LG는 미련없이 단가를 낮춰 공급해줄 타 죽염회사와 거래하였고 그 때문에 죽염역사 왜곡은 더욱 심화되어갔다.
출처: http://kor.theasian.asia/archives/314274
당뇨, 고혈압, 간암, 폐암, 신장암, 위암, 뇌종양, 백혈병, 황달을 비롯하여 에이즈, 골수암, 베체트, 근위축증, 흑색암, 섬유종, 루게릭, 별별 듣도 보도 못한 희귀난치병에 대한 온갖 처방이 인산의 입에서 술술 흘러나왔다. 아시아 동쪽 반도 끝에 있는 한국의 동남쪽 궁벽한 지리산 산골마을 함양, 다 쓰러져가는 초막에서 최첨단 의료선진을 자랑하는 미국도 못 고치는 현대 희귀난치병 환자의 각종 처방이 매일매일 쏟아져 나오고 있었다.
인산의 좁은 마당 한켠에선 최신식 암신약개발이 이루어지고 있었다. 최고의 천연항암제 청색담반이 가스를 내뿜으며 숯불에 타고 있었는데 인산이 발명한 암신약 중에 가장 강력한 암세포 살해효능을 자랑하는 천연항암제였다. 국립암센터, 삼성의료원, 서울아산병원이 설립되기 훨씬 이전의 일이다. 지리산 인산의 초막은 이미 지구촌 최고의 암센터였던 것이다.
인산을 찾아오는 사람이 많아짐에 따라 그의 노년기는 피곤함과 시달림으로 점철될 수밖에 없었다. 잠도 제대로 잘 수 없는 나날들이 이어졌다. 하루 종일 환자들을 대하는 것도 모자라 자정을 넘긴 새벽 시간에도 대문을 두드리는 절박한 환자가 끊이질 않았다. 또 찾아오는 사람들이 많다 보니, 그중에는 별 사람이 다 있었다. 물론 여러 병·의원을 전전했으면서도 살 수 있다는 가망성을 찾지 못한 그들의 상한 마음을 생각하면 이해하지 못할 일도 아니었으나, 예의와 염치를 모르는 몰상식한 사람들이 종종 있었다.
“이게 무슨 처방이오? 유황오리를 삶아 먹으라니, 이것도 약이란 말이오?”
“영감님이 책임질 수 있어요? 만일 한 달 안에 제 병이 낫지 않으면 어떻게 하시겠어요?”
“차비와 시간을 들여서 여기까지 왔는데, 하고 사는 집 꼬락서니를 보니, 얘야, 아무래도 헛걸음을 한 것 같구나. 그냥 돌아가자.”
인산은 그런 사람들을 볼 때마다 가슴을 쳤다. 평생토록 그의 가슴에 엉겨 붙은 응어리가 꿈틀꿈틀 치밀어 올라 불같이 역정을 내기도 했다.
“천하에 미개한 종자 같으니라고. 머리에 똥만 든 버러지보다 못한 놈이로구나. 썩 내 눈 앞에서 사라지거라.”
당시 인산의 부인은 살림을 꾸려나가기 위해 인산이 발명한 유황 등 약재를 섞어 먹인 유황오리를 사육하였다. 그리고 그것이 필요한 환자들에게 한 마리 당 1만~1만 5천원씩에 팔았다. 사육하는 데 들어간 금액을 감안해서 책정한 가격이었다. 그런데 일부 사람들은 그것을 또 걸고 넘어졌다.
“도사가 돈 맛을 알더니 오리 장사를 하면서 폭리를 취하는구먼.”
역시 약재로 쓰기 위해 집 대문 앞에서 키우는 염소들을 보고 비아냥거리는 사람도 있었다.
“도사가 몸보신을 하려나, 웬 염소를 키운담?”
어차피 그런 무지한 이들은 유명한 지리산 도사라니까 그저 한번 들러나 본 것이고 인산이 써주는 작은 처방 쪽지가 그들을 염라대왕 앞에서 빼내줄 유일한 천금같이 귀중한 티켓이라는 걸 알리도 없었다. 그러나 대부분은 절실히 도움이 필요한 가련한 환자들이었다. 병원을 전전하다 사형선고를 받은 환자나 보호자들은 살길이 있을까 하는 마지막 희망에 손바닥만한 어두컴컴한 방안에 서로 서로 어께를 맞대고 쪼그리고 앉아서 그들의 앞에 가부좌를 틀고 앉아 있는 긴 흰 수염, 부처님같이 축 늘어진 귓불을 지닌 도사 풍모의 인산을 간절한 눈빛으로 쳐다보고 있었다.
인산은 자신의 피곤함도 잊고 자신이 지니고 있는 우주와 신약의 비밀을 이 세상에 한 조각이라도 더 내놓고 가려는 듯 알아듣든 못 알아듣든 아랑곳하지 않고 평범한 보호자들을 앞에 놓고 석학들에게 강연하듯 우주의 법칙과 신약의 비밀을 설파하곤 했다. 인산의 전문 의학강연은 그렇게 상담 도중에 녹취한 녹음으로 일부나마 남게 되었다. 다 죽는다고 했지만 인산의 처방으로 기적처럼 살아난 말기암 환자들의 입과 입을 통해 지리산 도사 인산의 명성은 날로 높아져 매일 함양읍내는 낯선 타지인으로 붐볐다.
자식들이 들러도 부자간에 제대로 편히 대화를 나눌 짬도 없었던 게 그 즈음의 형편이었다.
좁은 방안에서 하루종일 온갖 환자들이 북적거리는 광경에 자식들이 걱정스러워 한마디씩 하면 “피곤해도 어쩌겠냐? 내 도움을 바라고 찾아오는 사람들인데…….”
라며 평생을 그랬듯이 무료진료를 계속하였다.
수만 명의 환자를 치료한 인산은 기력이 많이 쇠약해져 가능한 한 공개 강연회에 나가 강연을 하는 범위에서 활동을 제한하고 싶었지만, 방문해 오는 난치병 환자들이 끊이질 않아 현실은 뜻과 같지 않았다.
그 사이(1987년)에 인산을 종신 회장으로 추대한 ‘민속신약연구회’가 발기인 2백여명이 동참한 가운데 서울 프레스센터 19층에서 창립되었다(동 연구회는 1990년 3월 ‘건강문제 연구 시민모임’으로 명칭을 바꿨음). 그리고 1989년 7월에는 인산의 의술을 연구하려는 사람들의 강렬한 요청에 따라 인산의 독특한 의방(醫方)을 연구·실천·보급하는 한편 동서 의학의 상호 수용을 통한 발전 방향을 모색하기 위한 목적으로 월간 잡지 <민의약>(民醫藥)이 창간되었고, 인산은 그 잡지사의 회장으로 추대되어 취임하기도 했다(<민의약>은 1990년 4·5월호부터 <건강저널>로 제호가 변경되었음).
그 당시의 세상에는 죽염이라는 것이 없었다. 인산이 처음 죽염을 발명하여 개인적으로 만들어 환자에게 써온 것이니 제도적으로도 죽염의 제조·판매에 관한 규정이 있을 리 없었다. 제조허가를 받기 위해 인산의 아들이 1년여 동안 관계기관에 질의를 하거나 법조문을 연구한 끝에 함양 군청에 염제조 허가 신청을 했다. 그리하여 1987년 겨울 세계 식품제조업 역사상 처음으로 죽염을 등록하고 생산하여 시판하게 되었다.
1917년 인산이 아홉 살 때 세계 최초로 죽염을 발명한 이래 함남 홍원에서 처음 죽염을 굽던 날로부터 전국을 떠돌며 여러 차례 죽염을 만들어냈지만 정식으로 허가받고 상표를 붙여 제조하기는 70년만의 일이었다. 인산이 발명한 죽염이 인체에 상상을 뛰어넘는 효과를 발휘하고, 난치병을 치료하는 데 없어서는 안 될 귀중한 약이 된다는 사실은 무수한 사례로써 실증된 터였다.
따라서 죽염의 효능과 가치가 일반인들에게 알려지는 데는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인산의 차남이 시작한 죽염 사업이 활기를 띠기 시작하자, 곧 여기저기서 죽염 제조업체들이 우후죽순처럼 생겨났다. 누군가의 사업이 잘된다 하면 곧바로 따라서 하는 사람들이 생겨나기 마련이었다.
그 때 인산의 저서 <신약>을 출판해준 밀알출판사 이경용 사장(향봉스님 동생)은 <신약>이 뜻밖에 베스트셀러가 되어 민간에 반향을 불러일으키자 인산의 죽염에 관심을 갖고 함께 죽염사업을 하자고 제의했는데 인산의 차남은 동업을 반대하고 독자적인 죽염사업을 추진했다.
인산은 차남이 직접 죽염사업에 뛰어드는 것을 못마땅하게 여기고 타인인 밀알출판사에 맡기기를 바랐지만 가난에서 한번 벗어나 세상에 출사하고자 하는 아들의 솟아오르는 의지를 꺾기에는 역부족이었다. 인산의 아들이 천신만고 끝에 죽염제조허가를 받아 사업체를 차리자 몇 년 후 밀알출판사 이경용 사장 측은 할 수 없이 독자적으로 개암죽염을 창업하고 스토리텔링을 위해 죽염의 역사를 날조해 승가의 비전이라는 선전에 열을 올렸다. 이경용 사장 측이 불교계의 인맥을 활용하고 특유의 영업마인드로 전국 사찰을 중심으로 죽염을 홍보해나가자 죽염은 불교신자들 속에서 빠르게 확산되기 시작했고 한동안 신문과 잡지, TV에 죽염에 대한 기사가 빈번하게 등장하였다.
죽염이 갑자기 대중에게 선풍적인 인기를 끌자 대기업인 LG에서 발 빠르게 잇몸염증에 탁월한 죽염의 효능을 강조하며 죽염치약을 특허등록하고 식약청 허가를 내어 시장에 내놓았다. 바로 그 전에 LG측 인사가 당시 회사대표를 맡고 있던 차남(윤세)에게 찾아와 치약에 들어가는 죽염을 싼값에 납품해줄 수 있느냐고 문의해왔다. 당시 죽염은 인산의 발명원칙에 의해 아홉 번 고열로 구워내는 진정한 죽염만 생산하던 터라 죽염을 아홉 번 구워 완성하려면 약 50일이 소요되어 원가조차 상당히 고가였고 죽염이 날개 돋힌 듯 잘 팔렸기 때문에 차남은 값싼 원료판매를 거절하였다.
사업상 단가에 맞춰 정품 9회죽염 대신 한번 구운 값싼 죽염을 생산하여 납품하였더라면 장기적인 관점에서는 대기업에 의한 선전효과가 컸겠지만 당시 차남이 거절했고 LG는 미련없이 단가를 낮춰 공급해줄 타 죽염회사와 거래하였고 그 때문에 죽염역사 왜곡은 더욱 심화되어갔다.
출처: http://kor.theasian.asia/archives/31427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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